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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가희 Feb 25. 2019

어느 학력 콤플렉스 환자의 고백

나는 초대졸의 방송작가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쯤, 남들에게 굳이 얘기하고 싶지 않은 약점이 있다.

나에게는 오랜 지병이 있었다. 병명은 바로 '콤플렉스'. 그건 정말이지, 좀처럼 낫기 힘든 지독한 병이었다.

나는 스물한 살, 전문대 문예창작과 졸업반인 2학년에 재학 중일 때 어쩌다 방송작가가 되었다. 당시 드라마 작가였던 한 교수님이 휴먼 다큐멘터리 메인작가 일을 하고 계셨는데, 그 손에 이끌려 막내작가로 들어간 것이 계기였다. 여느 학생들처럼 나도 사회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 빨리 그곳에 발 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그것이 훗날 나에게 얼마나 큰 콤플렉스가 될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일을 시작했을 때는 고작 스물하나. 입봉을 하고 내 코너를 맡아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스물셋. 처음으로 짧은 프로그램의 메인작가를 경험했을 때는 스물여덟. 10년 차가 된 지금의 나이는 서른하나다.

다른 작가들과 비교했을 때 나는 줄곧 심하게 어렸고, 그래서 일을 하며 누가 내 나이를 묻는 것에 극도로 민감했다.

나는 내가 어리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부단한 노력을 했다. 항상 외모도 말투도, 모든 에티튜드를 어른스럽게 하는 연습을 했는데, 그것이 어린 나에게는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확하게는 나이가 어린 것이 콤플렉스는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나이를 얘기하면 그다음은 자연스럽게 "어떻게 그렇게 일을 일찍 시작했죠?"라는 질문이 되돌아왔고, "아 저는 전문대를 나왔고 졸업하기 전부터 일을 시작했어요"라고 얘기해야 했다. 그런 적이 정말 수백 번이었던 것 같다. 나는 굳이 내 학력을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그 얘기를 하고 난 후, 상대가 나를 어떤 고정관념을 가지고 바라볼지 상상하는 것도 귀찮았다. 대답 대신 그냥 끄덕이는 상대의 얼굴을 보는 게 너무 싫었다. 이게 바로 내 콤플렉스였다.



사실 방송 일은 학력이나 스펙을 따지는 직업군은 아니다. 같은 학교 같은 과를 나온 친구들 중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나보다 몇 년 늦게 일을 시작한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은 이런 일로 스트레스를 받진 않았다. 나이가 어리지 않았기 때문에 학력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없었고, 굳이 얘기할 일도 없었던 것이다.

나보다 10년, 20년 정도 선배인 작가 언니들 중에서는 서울대나 이대 같은 명문대를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예전엔 방송작가가 꽤나 고상하고 지적인 직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점점 매체와 콘텐츠는 늘어가는데 반해 제작 상황이나 처우는 나아지지 않아서였는지, 방송작가의 '자격'은 점점 폭넓어지고 있는 추세다. 그래서 전문대를 나온 작가들이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가끔은 고졸인 작가들도 볼 수가 있다. 학력이나 스펙보단 능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직업임이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의 학력에 대한 팩트에 그렇게 신경 쓰고 있다는 건, 명백한 자격지심이었다. 하지만 이 일로 상처 받은 적은 있었다.

내가 4년 차 정도 됐을 무렵, 막내작가 때 같이 일했던 메인작가 언니에게 함께 일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이것저것 조율하는 과정에서, 전에 일하던 팀에서 원고료를 얼마 받았었는지 얘기하면서부터 대화가 조금 꼬였다. 그 원고료는 연차에 비해 많지도 적지도 않은 금액이었는데, 언니는 그 금액을 맞춰주기 힘들다 했었다. 이유인즉슨, 팀 내에 나보다 나이가 많지만 연차는 어린 작가가 있는데, 그 작가보다 나에게 돈을 더 많이 줄 순 없다는 거다. 여기까진 좋았다. 하지만 언니가 뒤에 덧붙인 말에 나는 너무도 상처 받고 말았다.

"옛날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은 개나 소나 다 작가 하는 것 같아. 요즘엔 고졸들 이력서도 많이 들어온다니까! 그런데 전문대 나온 애들은 당연히 일을 일찍 시작할 수밖에 없잖아. 그런 애들한테 돈을 더 많이 줘야 할까? 아니면 연차는 어리지만, 4년제 대학 나오고 해외 다니고 경험 더 많은 작가들에게 돈을 더 많이 줘야 할까?"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같이 일하자고 제안하기 위해 전화한 선배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느냔 말이다. 그 선배는 원래 말을 잘 가리지 않는 성격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걸 감안하고서라도, 나는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고,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혔다.

사실 이 이슈는 불문율과 같았다. 우리는 프로그램마다 자리를 옮겨가며 일하고 있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이렇다 할 규정 없이 연차에 따라 책정된 원고료를 받으며 일하고 있었고, 선배들은 그것에 대한 고민이 없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어린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개나 소나'라는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돌이켜보면 콤플렉스는 그때의 상처에서부터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한 번은 뜻밖의 장소에서 비슷한 기분을 느껴야 했던 적이 있다. 사귀는 단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호감을 가지고 만나던 상대가 있었는데, 퇴근 후 함께 맥주를 마시던 중이었다. 당시 우리는 서로를 알아가고 탐색하는 과정 중에 있었다.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건, 항공물류 쪽 연구원이며 캐나다에서 유학을 했고 대대로 의사 집안에서 자랐다는 것 정도였다.

그는 재치 있는 성격도 아니었고, 대화가 찰떡처럼 잘 통하지도 않았지만 그럭저럭 분위기는 괜찮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화의 흐름이 좀 이상했다. 나는 대학교 때 주로 신촌에서 놀았는데 너는 어디서 놀았었니 라고 묻길래, 아무 생각 없이 대학로에 자주 갔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아 거기 무슨 학교가 있더라, 성대도 있고 좀 위에는 고대도 있지?"라고 하는 거다. 당연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추궁하듯 묻는 상대가 너무 불편해 그 자리에 더 이상 앉아있고 싶지 않았었다.

다음 날 친한 언니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명백한 자격지심이라고 나를 나무라기도 했다.

20대를 내내 콤플렉스를 숨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왔던 나에게도 30대가 왔고, 이제 꺾였다며 한탄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난 정말 기뻐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나보다 나이 많은 후배가 흔하지도 않고, 어리다고도 말할 수 없는 나이이기에 콤플렉스를 드러내야 하는 일도 자연스럽게 적어지고 있었다. 결국 나는 콤플렉스를 이겨내지 못했고, 시간이 해결해준 셈이었다.

나에게 학력이 그러했듯, 누군가에게는 외모가. 누군가에게는 가족이. 누군가에게는 성격이. 모두들 자신만의 약점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산다.

그리고 그걸 인정하기란 정말이지 쉽지가 않다. 그래서 그걸 극복하기도 쉽지가 않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아주 조금 홀가분해진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 글에서라도 인정하고 털어놓지 않았는가. (그래도 극복했다곤 말 못 하겠다)

예전에 한 드라마에서 "암도 생명체인데 같이 살아야죠"라는 기막힌 막장 대사가 나온 적이 있다.

그렇듯 콤플렉스도 우리 몸의 일부이자, 심지어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움찔하고 온 몸이 아파오는, 생명체가 아닐까.

우리는 모두 암보다도 더 낫기 힘들 정도로 지독한 '콤플렉스'라는 병에 걸려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것에 대한 처방은 아마, 환자의 성격과 병의 진행 상태에 따라 모두 다를 테고. 그러니 먼저, '인정'부터 해보는 게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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