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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가희 Sep 06. 2019

고데기가 고장 나서 울었다

고장 난 건 그것만이 아닐지도


여느 때와 같은 오후였다.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 먼저 드라이어로 머리카락을 말린 뒤 고데기 코드를 꽂고, 고데기가 달궈지는 동안 화장을 하고 옷을 입는 것. 이것이 나의 루틴이었고, 40분 남짓이 소요된다. 때문에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집을 나서기 40분 전부터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여느 때와 다름없는 코스를 밟던 중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화장을 하는 동안 이미 달아올라 있었어야 할 고데기가 차가웠다. 이리 꽂고 저리 꽂아 봐도 온기라곤 없었다. 그렇게 내 일상이 틀어졌다.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났다. 어제까지 멀쩡하게 사용하던 고데기인데. 단 한 번의 예고도 없이 고장 나버린 그것이 야속했고, 서러웠다.

이 ‘문제의 고데기’는 정확히 언제, 어떻게, 왜 구입해서 사용하게 됐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물건이었다. 적어도 10년 이상은 되었으리라. 출근을 할 때도, 약속 장소로 향하기 전에도,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도 항상 나의 단발을 매만져줬다. 이렇게 매일을 함께 하면서도 단 한 번도 고데기가 고장 날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고, 대처법 또한 마련하지 않았다.

예컨대 ‘곧 고데기가 고장 날 수도 있겠는데? 그러지 않게 잘 보관해야겠다!’ 또는, ‘그럼 다음에는 조금 더 튼튼하면서도 머릿결을 덜 상하게 하는 고데기를 사야지.’ 같은 작은 계획 말이다.

당연하다는 듯 항상 같이 있기 때문일까. 우리는 이렇듯 ‘자주 쓰는’ 것일수록 신경 써서 돌보지 못하기도 한다. 부모가 늙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수없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어느 쪽으로 이직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갖가지 경우의 수를 세우는 등, 특수한 상황에 대한 ‘뒷일’은 자주 계획하곤 하지만 말이다. 매일 쓰는 물건과 감정이 지금 건강한지는 들여다보지 않고 너무나 방관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차가운 고데기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매일 쓰는 웃음과 매일 쓰는 글, 매일 쓰는 말들은 모두 무사한 상태인 걸까. 혹시나 내가 돌보지 못한 사이, 고장 나기 직전으로 달려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나이 서른 넘은 어른이 고장 난 고데기를 보고 주저앉아 흘린, 황당한 눈물의 이유가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일상 속에서 종종, 예기치 못한 순간에서 서러움이 폭발할 때가 있다. 매일 듣던 노래가 오늘따라 갑자기 슬프게 들리기도 하고, 우산을 쓰고 걸을 땐 괜찮았는데 실내에 들어와 창문으로 들이치는 빗줄기를 보고 왈칵하고 마음이 젖어버리기도 한다. 그것은 쌓여있던 아픔 또는 고민, 또는 분노가 막 흘러넘치려는 신호이기도 하다.

오늘의 나 또한, 실은 고데기가 고장 났기 때문에 눈물이 터진 것만은 아닐 거다. 마음 어딘가가 덜컹거리는 것이 분명했다.

지각 행 버스에서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나는 생각했다. 고장이 나버리기 전에, 오늘 밤엔 나를 조금 돌봐줘 봐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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