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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가희 Sep 16. 2020

루앙프라방에 푸시산이 없었더라면

조금은 슴슴한 그 풍경의 위로


신성한 언덕, 푸시산


루앙프라방 시내의 중심지인 시사방봉 거리 중간쯤, 봉긋하게 솟은 산이 하나 있다. 라오스어로 ‘신성한 언덕’을 뜻하는 푸시산. 약 100m 높이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현지인들에게는 정신적 지주이자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고 여행객들에게는 해돋이와 해넘이 장소로 사랑받는 곳이다. 시내의 어느 곳에서도 푸시산이 보이고 푸시산에 오르면 시내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으니, 푸시산은 루앙프라방 그 자체인 것이다.


여행자 거리에서 찾아가기가 매우 쉽고 경사가 완만해서 어렵지 않게 정상까지 갈 수 있기에 여행자들의 입장에서는 안 갈 이유가 없는 곳이다. 우리도 일몰 시간을 조금 앞두고 푸시산에 오르기로 했다.    


328개의 계단을 올라 등산 10분 만에 도착한 정상. 듣던 대로 정말 사람이 많았다. 노을을 보기 위해 모인 여행자들이 각자 자리를 차지하고 서 있거나 앉아 있었는데 그야말로 시장통을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잠시 당황했지만, 우리도 얼른 빈자리를 찾아 맡았다.    


푸시산 정상. 사람 진짜 많다..



각자의 사정, 각자의 아픔    


사람마다 각자 ‘정말 싫은 상황’이 있다. 어떤 사람은 약속 시간에 늦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이 정말 싫을 테고, 어떤 사람은 무리 속에서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정말 싫을 것이다. 그리고 배고픈 상황을 못 견디거나 할 말을 참으면 화병이 나는 사람도 있을 테지. 나는 굳이 ‘싫어하는 상황 하나만 고르자면, 주변에 사람이 많은 상황을 정말 싫어한다. 정확히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이 두렵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갇힌 듯한 기분이 들 때면 아주 가끔 공황상태에 빠지기도 하는데, 만원 지하철과 엘리베이터에서는 식은땀이 나며 정신이 아득해진 적이 있다. 그래서 붐비는 시간을 피해 출퇴근을 하고, 사람들이 많이 가는 번화가는 되도록 가지 않는다. 여행을 가도 사람이 없는 곳만 찾아다녔다.    


이러한 공포심의 시작점을 알고 있다. 2016년 겨울, 엄청 빡센(!)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다. 세 개의 프로그램을 한꺼번에 하고 있었는데, 특히 한 프로그램에서는 이전에 하던 역할보다 할 일이 많고 부담감이 많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 몇 날 며칠 잠도 못 자고 열심히 일했지만 맘과는 다르게 채널 시사에서 자꾸만 혹평을 받는 거다. 수정과 수정을 거듭하면서 두 번에서 세 번으로, 그리고 네 번으로 시사가 늘어나게 됐다. ‘다시 해오세요’가 계속 반복되는 거다.    


그때 두 평 정도 되는 편집실에서 시사를 했는데, 내가 맨 안쪽에 앉고 담당 피디가 모니터 앞에, 그리고 다른 팀원들과 팀장, 메인작가 언니와 채널 CP 등이 몰려들어와 차곡차곡 쌓이듯이 앉았다. 안 그래도 시사 시간만 다가오면 가슴이 쿵쾅거려서 미칠 것 같은데, 내 주변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시사 분위기도 안 좋은데 이 상황에서 화장실 가고 싶으면 어떻게 저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가지?’하는 공포까지 엄습했다. 나는 당시 몸과 마음이 너무 혹사당하고 있었다. 마음만 앞서서 스스로 감당하지도 못할 많은 양의 일을 펼쳐놓고 아등바등하고 있었다.


여하튼, 이 사건으로 비롯된 트라우마 때문에 사람이 많은 곳이 싫어졌다. 근데 푸시산 정상에 이렇게 사람이 많다니.     


사람들 사이에 까치발을 들고 서서 노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아무렇지가 않은 거다. 아니 심지어 마음이 편안해져서 앞사람 엉덩이에 코가 닿을 지경인데도 자리에 잠시 앉아 쉬기도 했고, 해를 향해있는 사람들의 촘촘한 뒷모습을 구경하기도 했다. 식은땀도 나지 않았고, 어지럽지도 않았다. 급기야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인식되지도 않았다. 편안했다.     


나는 장소와 사람이 가진 ‘기운’을 믿는 편인데, 이 도시의 어떠한 착한 기운이 나를 보호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정말 이 산이 신성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여행에 취한 나의 현지뽕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말이다. 아마도 마음의 문제겠지.         



슴슴해서 더 위로가 되는 푸시산의 풍경


사실 푸시산의 풍경은 별 볼일 없다. 화려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루앙프라방을 ‘재미없는 곳’이라 표현하기도 하는데, 푸시산의 풍경이 그렇다. 황톳빛 메콩강 위로 떨어지는 해는 아름답지만, 그냥 노을일 뿐 생각보다 유니크한 무언가가 있는 건 아니다. 도심의 타워에서 보는 번쩍번쩍한 야경도 없고, 건물의 모양새나 높이도 거의 비슷비슷하다.  하지만 나는 그 별 볼일 없는 풍경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


일행은 조금 더 좋은 노을 스폿을 찾아 나섰고, 잠시 자리를 지키던 나는 해가 넘어가는 것을 다 보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천천히 산 정상(매우 좁음)을 몇 바퀴 돌며 아래를 바라보았다. 메콩강 쪽을 바라보면 석양이 보이고 남칸강 쪽을 바라보면 소담한 마을이 보이는데, 마을이 잘 보이는 남칸강 쪽에 앉아 캄캄해질 때까지 바라보기로 했다.


일부러 눈부신 노을보다 소박한 마을을 택했다.


메콩강과 (나름의) 신시가지.
반대쪽 올드 타운.


오늘의 여행을 잠시 쉬어가는 순간이었다.     


초록색 도화지에 주홍색 사다리꼴 도형을 잔뜩 그려놓은 듯 단조로운 풍경. 그 단순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한없이 쳐다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산이 아주 높았으면 저 아래가 마치 다른 세상처럼 아득하게 보였을 텐데, 푸시산은 높이가 낮아 지붕들이 그리 멀지 않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해 보이는 마을을 보며 생각했다. 저 주홍 지붕 아래에도 각자의 삶이 존재하겠지. 각자의 아픔과 각자의 상처. 그리고 기쁨. 그리고 위로. 각자의 풍경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놓인 풍경은 노트북도 아니고 티브이도 아니고 루앙프라방. 그것이 ‘우와!’하고 감탄해야 하는 대단한 풍경이 아니어서 감사했다. 자극적이지 않아서 감사했다.    


우리는 평소에 너무도 빽빽한 풍경 속에 빡빡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여행의 풍경마저 늘 경이롭기만 하다면 그것 또한 너무 피곤한 것 아닐까. 루앙프라방에 푸시산이 있어 정말이지 다행이다. 다시 루앙프라방에 간다면 머무는 내내, 매일매일 푸시산에 오를 거다.        


그리고 언젠간 푸시산에서 바라본 풍경이 너무나 그리워서 눈물이 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노을 참 아름다운 것.





※ 이 여행기는 2019년 11월, 누구나 마음껏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가깝지만 먼 과거의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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