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에서 만난 것들
내가 살지 않는 골목으로의 여행
나는 골목 산책을 좋아한다. 갑자기 생긴 여유에 뭘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을 땐 산책보다 좋은 건 없다. 날마다 집 근처의 새로운 골목길을 탐색하면서 집들의 모양과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 내 취미이기도 하다.
우리 동네 골목 산책도 참 좋지만, 가끔은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으로의 산책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난다.
루앙프라방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다음 날엔 저녁 비행기를 타고 비엔티안으로 떠나는 일정이었다. 묵었던 호텔에 배낭을 맡겨두고 정처 없이 루앙프라방을 걸어보기로 했다.
내가 살지 않는 골목에서의 풍경은, 모든 게 다 신기하고 예쁘다. 길거리 노점은 물론 발코니에 널려 있는 빨래들까지 왠지 느낌 있어 보이는데, 유명 관광지를 다니는 것과는 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있을 누군가의 집들이 소리 없이 서 있는 곳. 지금 내가 걸어가고 있음에도 미지의 세계인 것만 같은 그곳. 골목을 걷다 보면 그들의 삶이 더욱 궁금해져 오래오래 그곳에 머물고 싶어 진다.
그런 루앙프라방의 골목에서 만난 소소한 힐링들.
책 말고 풍경, 메콩강변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 우리는 메콩강변으로 걸어갔다. 강변에 위치한 식당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셔야겠다 싶어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상하게 시작부터 여유로운 하루였다. 신나게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감탄했던 지난 며칠과는 다른 분위기와 공기. 어쩌면 우리는 휴식이 필요했던 걸까. 많은 대화를 하지 않았으며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나는 책을 읽으며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챙겨는 왔지만 이번 여행에서 한 번도 읽지 못한 책을 펼쳤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 있는 메콩강과 살랑살랑 기분 좋은 바람이 자꾸만 독서를 방해하는 거다. 책에 집중하려 해도 자꾸만 눈을 돌려 강 쪽을 바라보고 싶었다. 결국엔 몇 장 읽지도 못하고 책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결국 책 대신에 주변의 풍경을 들여다봤다. 우리가 앉아있는 식당의 주변으로는 아무렇게나 어질러져 있는 날 것의 그림들이 펼쳐져 있었다. 강 아래에선 작은 배가 들어오고 나가고를 반복하고, 한눈에 봐도 거칠어 보이는 노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그늘 아래 놀고 있는 현지의 아저씨들(?)이 보였다. 우리나라 전통놀이인 자치기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는데 이 시간에 일 안 하고 왜 저러고 있는 거지- 싶기도 했지만, 너무도 여유롭고 즐겁게 놀고 있는 그 모습을 보니 나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커피는 정말 맛이 없었다. 마치 커피맛 시럽같이 달고 끈적한 맛. 맛없는 커피는 거의 다 남긴 채 우리는 다음 풍경으로의 골목 여행을 떠났다.
강가의 펍은 어디든 유토피아
루앙프라방의 명소 중 ‘유토피아’라는 곳이 있다. 남칸강을 바라볼 수 있는 넓은 마루에 방석과 빈백이 놓여 있어서 편안하게 누워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카페다. 사진이 잘 나오기로도 유명하다. 밤에는 신나는 음악이 나오는 bar로 변하는데, 소문난 핫플레이스인 만큼 사람도 많다. 우리는 밤에 유토피아를 찾아갔는데, 사람이 너무 많고 시끄러워 맥주를 마시지 않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었다.
그리고 남칸강변을 산책하다 보니, 꼭 사람 많은 유토피아에 갈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남칸강변은 현지인들의 삶이 있는 메콩강 쪽과는 또 다른 분위기다. 고급 스파와 식당들이 쭈욱 들어서 있는데, 깔끔하고 조용한 분위기다. 우리는 뱀부 브릿지를 건너서 강 너머에 있는 레스토랑에 갈 예정이었지만, 날씨가 너무 덥기도 하고, 그리 급할 거 없다는 생각에 강가의 펍에 앉아 맥주 한 잔 마시기로 했다.
메콩강보다 폭이 좁고 아기자기한 다리들이 곳곳에 놓여있는 남칸강. 그곳에서는 동네 아이들이 자유롭게 수영을 하고, 여행자들이 강가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잠시 쉬어간다.
한낮의 여유를 즐기며 마신 맥주는 라오스에서 마신 맥주 중 가장 맛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유토피아가 따로 없었다.
왕궁박물관 정원은 현지인들의 쉼터
과거 라오스의 궁정이자 지금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하우 캄(왕궁박물관)은 메인 거리에 크게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산책을 하던 중 우연히 뒷문으로 이 박물관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름대로 깔끔하게 잘 가꿔져 있었지만 인위적이지는 않은 느낌의 정원에는 나무마다 참파꽃이 열려 있었다. 입장료를 내고 박물관 내부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정원을 걷는 것만으로 좋았다. 정원에 앉아 데이트를 즐기거나 휴식들 취하는 현지인들이 보였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아주 뜻밖의 경험도 했다. 나는 아기를 무진장 좋아하는데, 벤치에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가 보이길래 다가갔다. 자그마한 몸에 큰 눈, 인형같이 긴 속눈썹이 예뻐서 까꿍~ 하고 얼굴을 숨겼다 내었더니 까르르 넘어가며 웃던 아기. 그렇게 한참 아기를 보고 있는데, 아기 엄마가 갑자기 나에게 아기를 안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마 화장실이 급했던 모양..)
아이는 낯선 사람인 나에게 잘 웃어줬고 엄마가 없다고 울지도 않았다. 라오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착한 건가?;; 잠시 후 다시 돌아온 아기 엄마는 고맙다고 말했다. 낯선 외국인에게 아기를 맡기고 화장실에 다녀올 정도로 경계심이 없고 순수한 엄마라니. 다시 한번 라오스 사람들이 좋아졌다.
그저 원하는 일을 해
골목마다 고요함이 가득했다. 어떻게 보면 잠든 도시 같기도 했지만, 그곳은 분명 살아있었다. 요란스럽지 않게 사부작사부작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도시. 정말이지, 걸을수록 떠나고 싶지 않았다.
계획이 없으니 시간이 남아돌았다. 하지만 ‘할 일 없다’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 루앙프라방이다. 할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지금 원하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루앙프라방에서 내가 할 일이었다.
아무 카페나 들어가 커피나 맥주로 목을 축여도 되고, 거리에 나와 있는 릴렉스체어에 앉아 발마사지를 받아도 된다. 자전거를 빌려 동네를 돌아다녀도 되고, 무작정 걸어도 된다. 여행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뜻밖의 경험을 선물해주기도 한다.
그렇게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고 국내선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갔다. 활주로 위에서 불타고 있는 루앙프라방의 마지막 노을을 바라보며, 꼭 이곳에 다시 오겠다 다짐했다. 그때엔 더 많은 골목을 깊숙이 탐험해야지.
안녕, 사랑스러운 나의 루앙프라방!
※ 이 여행기는 2019년 11월, 누구나 마음껏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가깝지만 먼 과거의 추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