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죽음을 직시하니 새로운 삶이 보였다

죽음을 떠올리며, 고통을 넘어선 자유

by 고은

죽음을 직시할 때 삶이 보인다


죽음을 많이 떠올려서 큰일(?)이다. 그렇다 해서 당장 '죽고 싶어'는 절대 아니다.

그냥, 나를 스쳐간 죽음들이 떠올라서 죽음을 많이 떠올리게 된다.


아직 스물다섯인데 이 짧은 생애에 내 곁을 떠난 이들이 있다. 이런 주제, 또 이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었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이어리에만 끄적이던 글 주제이다. 그냥 온전히 받아들이고 괜찮아질 때까지 묵묵히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나를 스쳐갔던 인연도

내게 소중했던 인연도. 죽음의 경중이 어디 있으랴.


삶은, 선택의 순간순간인데. 그때마다 지혜롭고 더욱 현명한 답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수없이 고민했다. 해답은 '죽음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눈앞의 죽음.


696680292.159810.JPG
696680915.593936.JPG


누군가는 나처럼 살면 피곤해서 어찌 사느냐 묻기도 하지만, 나는 이것이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굳건한 나무처럼 흔들리고 싶지 않지만 바람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것을 알고 바람에는 흔들림이 수반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내 삶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떠난 일들을 그리며 바라는 점은 딱 하나이다.

'지극히 평범하게 살게 해 주세요'. 배우의 꿈을 내려놓은 이유도 이 이유가 가장 크다.


관심이 곧 수입인 '배우'와 '평범함'은 괴리가 크니까.


한창 힘든 시기에는 모든 손길이, 그 연약하고 작은 손길들이 나를 덮치는 듯한 손으로 느껴졌고, 그럼에도 사랑하는 자들이기에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내게 언제나 필요한 것은

타인의 메시지. 온전한 휴식. 스스로의 인정. 생산적인 대화. 새로운 세계. 나아갈 용기. 위안.


024BD9D0-C907-45F3-BDFB-7F2F55F91525.JPG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언제나 죽음과 함께하고 있다. 죽음을 외면하지 말고 항상 죽음이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살아야 한다.’


온전히 내 것인 것들, 육체와 정신 그리고 삶과 죽음.


'죽음이야말로 우리를 우리답게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임을 뜻한다. 죽음을 직시할 때 그렇게 자신에게 다급하게 다가설 때, 다른 현존재에 대한 모든 교섭이 단절된다. 가장 독자적이고 물교섭인 이 가능성은 동시에 가장 극단적 가능성이다. 그리하여 죽음은 가장 독자적이고, 물교섭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으로 드러난다.'


하이데거는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떠올려 보라고 말한다. 현재의 삶을 이어나갈 것인가? 당장에라도 다른 것들을 즐기러 떠날 것인가? 정해진 답은 없다. 그렇지만 나는 죽음을 맞닥뜨려도 현재의 삶을 묵묵히 이어나갈 것이다 죽음의 직시야말로 살아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가장 큰 진리이다. 육체적으로 아프고 나서, 더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결국, 이 모든 건 내가 나를 너무 사랑하기에, 내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내게 더 좋은 것들을 주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




고통을 넘어선, 자유?


“언젠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 같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처음 이 문장이 떠올랐던 시기는, 나는 삶에 대해 아무런 희망도, 이유도 찾지 못하고 있던 시기였다.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시기가 있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고통이 내게 쏟아져 내리던 순간, 즉 자기 연민에 빠져 있던 시기..

나는 그 고통 속에서 살아갈 이유를 잃은 것처럼 느껴졌다. 주어진 하루를 감사함으로 살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나는 점차 그 말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되었다. 내 삶에서 가장 어두운 순간, 그 순간을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나를 다시 일어서게 하더라.


965524DC-C9DE-4F8F-8CAC-95984A83FB49.JPG
1445FC07-4E86-461E-B314-E134CA6F1B99.JPG


니체는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고 했다,

우리 모두는 어느 순간 삶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때 나는 그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무의미하게 돌아가는 일상 속 지쳐가는 나였기에.


그런데 니체는. '고통을 살아간 용기를 가진 자만이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라고. 아,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을 직면하여 살아가는 것만이 인간 존재의 진정성을 찾는 길이구나.


내가 '죽음'을 생각한 그 순간들은, 그저 삶의 어두운 그림자만 밟고 있던 시기였다.


그 그림자가 나를 구속하고, 내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든 원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고통이 내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니 달라지기 시작했다.

고통은 그림자일 뿐, 그것이 내 존재 정의가 아니구나.


니체가 말했듯, '우리 스스로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나아갔다.


IMG_1916.jpg
707664183.014407.JPG
703754281.460727.jpg


스물다섯의 나.


그 나이대에(?) 겪지 않아도 되는 필요 이상의 고통들을 겪고, 어찌 보면 그것들을 모두 극복해 온 나의 마음은 사실 날이 갈수록 더 무겁고 깊어져간다는 것을 느낀다. 삶의 도전,.. 실패, 고통, 기쁨, 행복 등.. 이 모든 게 나를 정의하는 요소가 되었다고 느낀다.


삶의 의미를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더욱 처절히 느끼는 반 오십이다. ㅋㅋ



니체의 말 중, 또 '가장 큰 적은 내가 나를 가두는 것이다'라고 했다.


내 안의 두려움과 불안, 자격지심, 결핍들을 마주하고 맞서 싸우며 존재의 진정성을 더더욱 발견해 나아가보려 한다. 어차피 고통은 삶을 살아가는 내내 존재한다.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닌, 고통을 이용하여 나의 자아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세상을 더 넓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20대 초반에 고통받지 않았으면 나는 얼마나 더 오랫동안 무력과 무의미를 헤매왔을까? 싶기도 하다.


696680560.724265.JPG


아,

언젠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 같다-는 생각을, 이제는 하지 않는다.


내가 지나온 그림자들에서 나온 말일뿐,

지금의 나는 그 길을 걷고 있지 않으니.


니체의 '초인'처럼, 나는 고통을 마주하며 고통을 살아가는 힘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앞으로 더욱 단단히, 뿌리 깊은 나무가 되도록 단련해 나갈 것이다.


삶은 여전히 불확실하고,

그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는 불안을 안은 채 끊임없이 선택해야 한다.


앞으로도, 고통이 나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길 -!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자폐증이란 무엇일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