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차별, 말하지 않는 침묵
'본다'는 것은, 시선의 끝에 내 마음을 두고 초점을 맞추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초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해지기도 한다.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의식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습관에 의한 반응'이 그 결정권을 갖게 된다.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냐면, 세상의 온갖 것에 쉽게 현혹되고 휘둘리기 쉽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매일을 허비하며 낭비하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동생'이란
나를 살아가게, 버티게 해주는 원동력이자 나침반이다.
내가 이루고픈 변화와 목표를 잃지 않도록, 내 초심을 지켜준다.
몇 년 전,
장애인식개선 공모전 아이디어를 떠올리다가 '장애', '인식', '개선'.
이 세 단어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장애? 그리고 인식. 개선?
세상에는 아무 이유 없이 '장애'라는 그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부단히 봐왔다, 한국에 더더욱 많은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들은 장애인을 직접적으로 대해본 적이 없기에 시선을 다르게 장착하고 바라보게 되는 것일 수 있고, 그것이 '차별의 시작점'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 자연스럽게 멀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어쨌든, 장애인의 가족 일원으로서 오래전부터 겪어온 부당한 사회 차별, 시선 개선에 목소리를 내고 싶었고 이 목표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100% 이해하지 못한다. 이 또한 나의 편협한 시선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여행지는 장애인의 이동권 수준을 살피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익숙'한 일.
사실, '익숙'이라는 단어 자체도 어쩌면 차별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해외의 지하철들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데,
그게 변질되어 한국에서는 전장연 시위를 벌이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대립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이 양극화를 어쩌면 좋을까. 너무 씁쓸하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현재 미디어엔 수많은 장애인식개선 캠페인이나 영상 콘텐츠들이 즐비하는데-
그런데 이 콘텐츠들은 과연 장애인이 실제로 보고 공감할 수 있을까?
'장애인', '장애를 가진 그 당사자가 시청하는가?'에 중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현재의 미디어들이 잘못됐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일한 인간으로서 공감할 수 있는, 즉 모두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제작하는 방향이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그들이 듣고 보고 싶어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흔히들 아는 '비장애인'이 아닌 '미(未) 장애인'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자신을 '비장애인'으로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의 손발을 묶고 있는 것은 차이가 아니라 '침묵'이다.
그럼에, 오늘날 더욱 차별의 양극화가 악화되어 가는 이 시점
깨져야만 하는 침묵이 얼마나 많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