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17일 저녁, 월요일 7시.
나는 평소처럼 마사지를 받으러 오리동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굴다리에서 나오던 차가 걸어가는 나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2월의 공기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목도리 속으로 파고드는 한기, 얇은 오리털 파카의 부드러운 안감이 위안이 되는 쌀쌀한 날씨였다.
쓰러진 나에게 낯선 이들의 손길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목도리를 벗겨 내 목에 대 주었고, 누군가는 편의점에 들어가 핫팩을 사 왔다.
“남편하고 통화하고 싶어요”
내 말에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 주었다. 그날의 시간은 흐르는 물처럼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시간 동안에도 남편의 전화번호를 또렷하게 기억해 직접 전화까지 했다고 한다. 전화를 받은 남편은 내 목소리가 너무 차분해서 가벼운 접촉사고쯤으로 생각했다며 웃으면서 말했었다. 의사는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다’라고 했지만, 그날의 장면은 지금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며칠 뒤 남편 핸드폰에 남아 있던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니, 119구급대원이 아니라, 사고를 신고해 준 분의 번호였다. 그제서야 사고 현장에서 나를 도와 준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은인 김지연이라는 분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지만 결국 만나지는 못했다.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 준비하는 동안, 작은 병원에서 수술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큰딸의 만류로 수술은 잠시 미뤄졌다. ‘고관절 치환술’이라는 큰 수술을 받았다. 수술실 앞에서 대기하는 시간, 온몸이 굳은 듯 떨렸다. 차가운 공기, 환한 불빛, 바쁘게 오가는 의료진의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괜찮을 거야’
‘혹시나... ’
안심과 불안이 끝없이 번갈아 밀려왔다.
수술이 끝난 뒤, 의사 선생님은 천천히 깊게 숨을 쉬는 법을 알려주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호흡을 천천히 깊게 쉬었다. 그 순간 살아있다는 감각이 내 안으로 천천히 돌아오는 듯했다. 수술은 다행히 잘 끝났지만, 통증은 숨을 멎게 했다. 무통 주사가 들어갈 때면 잠시 사라졌지만, 멈추면 날카로운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아득한 고통 속에서도 나는 버텼다.
8일 만에 퇴원했다. 교통사고 환자라는 이유로 수술한 병원에서 추천한 곳은 다 거절을 당했다. 결국 다시 119를 불러 동네 정형외과로 옮겼다. 정형외과에서 한 달 동안 치료를 받았고, 다시 병원을 옮겨야 하는 상황이 왔다. 양평국립교통재활병원으로 들어갈까 생각하고 서류를 준비했다. 가족 면회가 제한되고, 간병인 한 명만 허용된다는 조건이 마음에 걸렸다. 가까운 한방병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전엔 119 침대에 누워 들어갔지만, 이번엔 병실을 걸어서 들어갔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했다.
처음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하는 생각뿐이었다. 몸의 고통보다는 더 힘든 건 마음의 낯섦이었다. 매일 사람을 만나고, 골프와 필라테스 모임으로 하루를 채우던 내 삶이 한순간에 멈췄다.
병원에서 워커를 의지해서 한발 한발 걸었다. 내 모습이 낯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었다. 재활은 단순히 몸을 회복하는 과정이 아니었다. ‘이전의 나’와 ‘달라진 나’를 인정하는 일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매일 아침, 의사를 진료실에서 만났다.
“근력이 빠지지 않게 운동하세요. 계단을 이용하거나 두꺼운 책을 놓고 하루에 백 번씩 하세요. 이건 좋은 게 아니라 꼭 해야만 합니다.”
단호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 따뜻함이 있었다. 나는 그 말이 좋았다, 하루하루 운동하고, 침대 위에서도 스트레칭을 멈추지 않았다. ‘괜찮아, 오늘은 어제보다 더 나아졌잖아.’
조금씩 변화가 시작되었다. 내 표정은 부드러워지고 걸음도 단단해졌다. 몸의 회복보다도 더 큰 건 믿는 마음이었다. 그 마음 덕분에 신경과에서 받은 약도 조금씩 줄일 수 있었다.
벚꽃이 만발한 어느 날이었다. 병원 창밖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유난히 따뜻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용기를 내어 병원을 나와 탄천으로 향했다. 봄은 이미 한창이었다. 떨어지는 벚꽃을 손으로 잡으려는 사람들, 연인들의 속삭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바람결에 섞여 흘렀다. 천천히 걸었다. 살랑이는 바람 속 벚꽃잎이 눈처럼 흩날렸다.
‘벚꽃이 이렇게 예뻤던가?’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벚꽃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살아있다는 건, 이렇게 다시 봄을 맞이하는 일이구나.
그날 이후 나는 매일 탄천을 걷고, 벤치에 앉아서 봄을 느꼈다. 그 평온함은 내게 주어진 삶이 건넨 가장 큰 선물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 생일날 퇴원했다. 가족들과 함께하며, 다시 한번 태어난 듯 제2의 인생을 살아 보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퇴원하고 재활을 열심히 하며 지내던 어느 날, 우리들의 발라드라는 프로그램이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튜브를 찾아보았다. 예전부터 발라드를 유난히 좋아했다. 트로트 열풍에 잠시 묻혀 있던 내 발라드 감성이 다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홍승민이 부르는 ‘흩어진 나날들’을 틀었다.
“아무 일 없이 흔들리는 거리를 서성이지, 우연히 널 만날 수 있을까 견딜 수가 없는 날 붙들고. 울고 싶어”
노래가 시작되자 ‘울고 싶어’라는 가사에서 걸음을 멈춘 듯 마음이 멎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사고 후 한 번도 운 적이 없다. 가족들에게 약한 내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였을까? 강수지의 목소리로만 기억하고 있던 노래가 저음으로 흘러나오는데, 내 마음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노래를 핑계 삼아 난 실컷 울었다. 알 수 없는 후련함이 나를 편하게 했다.
평소 음악을 즐겨 듣는다.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하고, 노래를 배우는 것도 좋아한다.
사고 전 보컬 수업을 받다가 중단해 둔 것이 있었다. 홍승민 버전으로 ‘흩어진 나날들’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컬 선생님과 다시 수업을 잡았다. 선생님도 이 곡을 좋아한다며 반가워했다.
요즘 나는 집안일 하다가도 자주 흥얼거린다. 식탁 닦으며, 차 마시며, 산책하며, 조용히 ‘흩어진 나날들’의 한 구절을 따라 부른다. 가사를 모두 외운 것도 아닌데, 멜로디만 흘러도 입술이 먼저 따라 움직인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고요해진다. 목소리를 낸다는 건, 어쩌면 내 안의 생기를 확인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고 후 나는 ‘잘 걷는 법’을 배웠고, 이제는 다시 ‘노래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몸이 회복되듯 마음도 천천히 리듬을 찾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