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봄비 속의 친구들

by 신은정

7시 19분, 기차에 몸을 싣는 순간 나는 이미 친구들과 함께였다.

안 봐도 훤한 친구들의 시간. 경주가 지금쯤 봄꽃 축제일 터이지만, 그 친구들은 꽃보다 수다삼매경에 웃음꽃을 피우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 생각만으로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경애만 나왔을까, 셋이 다 나왔을까. 혼자 상상하는 사이 기차는 이미 경주에 닿아 있었다. 전화를 걸자 "택시 타는 쪽으로 나와"라는 목소리. 이미 차를 몇 바퀴째 돌고 있는 듯했다. 나머지 둘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있다며 혼자 나온 친구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비상등을 켜둔 채로, 나를 맞으러 걸어오고 있었다.

얼굴을 보는 순간 "얼굴이 좋아졌다"는 폭풍 칭찬에 반가움을 얼굴 가득 담고 서로를 안는다. 언제나 그리운 친구. 언제 봐도 가슴 가득 따뜻함으로 채워주는 친구. 그냥 보고만 있어도 마냥 좋은 친구다.


친구네 집은 경주의 오래된 가옥이다. 시어머니가 살던 집을 그대로 두고, 한쪽에 새 공간을 만들어 생활한 지 벌써 20년이라고 했다. 공간이 주는 힘이 얼마나 큰지. 우리는 환갑을 채운 나이이지만, 그 집 안에서는 시간을 거슬러 10대 소녀로 돌아가기도 하고, 다시 현재로 돌아오기도 했다. 시간을 초월한 경험이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울진에서 올라온 문어, 경주 친구가 준비한 미역국과 잡채가 상에 올랐다. 오늘이 친구 생일이었다. 모르고 즉흥적으로 잡은 번개 모임이었지만, 이 또한 예정된 시간처럼 느껴졌다.

부산역에서 사들고 온 어묵 두 봉지를 나누자는 친구에게 내가 말했다. "냉동실에 넣어두었다가 두고두고 먹으면 되잖아." 친구들 것도 챙겨오고 싶었지만 부산 여행에 함께한 일행이 있었던 터라 그러지 못한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책 한 권을 챙겨왔다. 울진 친구가 주문을 하다 하다 결국 아직 사지 못했다기에, 가방 속에 담아 온 《매일의 취향》 한 권을 건넸다. 네잎클로버 한 장을 책 사이에 끼워서. 시골에서는 책 사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피곤해 보인다며 잠자리를 봐두었다는 친구. "씻고 누워서 이야기하자"는 작은 배려에 아쉬운 마음을 접고 누웠더니, 친구들이 하나씩 들어와 누웠다. 누워서도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다 나는 조용히 꿈나라로.


"코를 예쁘게 골면서 잘 자더라"는 아침 인사와 함께 창밖을 내다봤다. 봄비였다. 처마 밑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오랜 세월 앞에서 땅에 구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어디선가 비를 피해 들어온 야옹이들에게 친구는 단지 속 사료를 꺼내 아침밥을 챙겨준다. 길고양이까지 보살피는 내 친구. 정이 많은 사람이라 그렇다.

경주 친구가 손뜨게로 만든 네잎클로버를 두 개씩 나눠준다. 울진 친구는 자기가 고른 색깔에 어울리는 가방에 달고 패션쇼하듯 한 바퀴를 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봄비 소식에 우산을 하나씩 챙겨온 친구들. 초록, 하늘색, 네이비, 베이지. 색깔이 하나같이 다 달랐다. 제각각의 우산을 쓰고 빗속을 걸으며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빗소리에 웃고 활짝 핀 꽃에 웃고 친구의 이야기에 또 웃었다.


어제 먹고 반해 다시 예약한 수정소반. 오이 절임, 100년 된 씨간장, 쪄낸 쌈의 크기와 정갈함에 감탄하는 사이 친구는 김치에, 한 친구는 김치찜에, 또 한 친구는 씨레기 불고기 맛에 꽂혀 있었다. 손수 만든 떡은 한 입 넣어보니 정말 맛났다. 방송에 탈 만하고 한식 요리 대회에서 1등 먹을 만했다.


점심 식사 후 커피 한 잔을 나누는 시간, 울진 친구가 우리가 좋아하는 노래를 물었다. 〈너에게로 또다시〉, 〈위스키 언더락〉, 〈모든 날 모든 순간〉. 즉석에서 편집해 유튜브에 올렸다. 〈모든 날 모든 순간〉이라는 곡과 너무 잘 어울리는 영상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나에게 들려주는 말 같았다.

아쉽게 헤어졌지만, 함께한 이 순간이 오래도록 기억되어 나를 행복하게 할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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