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초의 영국 전원마을과 여인들의 긴 드레스, 챙이 그리 넓지 않은 모자, 피렌체의 아르노강과 박물관 등 볼거리가 많았던 <전망 좋은 방>은 볼 때마다 새롭습니다. 아마도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능력 때문이겠지요. <전망 좋은 방>을 스토리가 아닌 여행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독신여성 소설가 앨리너 래비시(주디 댄치)일 겁니다.
루시가 숙소에 도착한 첫날 숙박객들과 함께 식사하는 장면에서 앨리너가 진짜 여행이 뭔지 자신의 생각을 쏟아놓기 시작합니다. "이 나라를 알려면 길을 벗어나라" 는 앨리너의 말은 진짜 여행이 뭔지 알려주는 일침이기도 합니다. 피렌체를 찾은 관광객들은 저택과 박물관, 미술관, 예배당을 돌아다니며 과거의 피렌체만 보고 떠납니다. 현재의 피렌체를 보고 싶다면 여행 가이드에 적혀있는 관광지가 아닌 길 밖으로 나가라는 겁니다. 그래야 진짜 이탈리아를 볼 수 있다는 얘기지요. 그런 생각은 샬롯과 피렌체 관광을 할 때 오롯이 드러나지요.
앨리너 래비시가 추천한 피렌체 길 밖의 도시들
피렌체에서 북서쪽으로 약 16km 떨어진 성곽도시. 프라토
고대 로마 극장의 유적, 중세 건축 사적이 많고, 16세기의 마욜리카 도자기가 유명한 도시 '구비오'
20세기 최고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스무 살이 되던 1907년에 체르토사 델 갈루초 수도원을 처음 방문해 대단한 감명을 얻는다. 이 수도원은 르 코르뷔지에가 평생 건축과 도시를 설계할 때마다 떠올렸다 한다. 젊은 코르뷔지에에게 중요한 건축적 영감을 불러일으켰던 봉쇄 수도원 '체르토사 델 갈루초' 는 출입문은 안에서 열 수 없으며 작은 개구부로만 음식을 공급받는다. 평생 기도와 묵상으로 일생을 보내는 수도사들의 봉쇄 수도원 '체르토사 델 갈루초'가 피렌체 근교 갈루초 지방에 있다.
훌륭한 탑들의 도시로 알려져 있는 산 지미냐노는 잘 보존된 12개의 성곽들이 있어 중세 건축으로 유명하다.
피렌체 근교에 위치한 성곽도시 몬테리지오니
오다 마코토의 세계 기행문 '뭐든 봐주마'와 비슷한 앨리너의 여행 패턴
1961년에 출간된 오다 마코토의 세계 기행문 <뭐든 봐주마>에 자극을 받아 세계로 시선을 돌린 젊은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여행지에서 새로운 시각을 최대한 많이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뭐든 봐주마' 정신이라고 책에 쓰여 있습니다. 오다 마코토는 뭐든 봐주겠다는 정신으로 숙박시설을 등급별로 다양하게 즐깁니다. 여행 초기에는 먼저 고급 호텔에서 묵고, 그 후에는 역 앞에 있는, 1박에 5만원 정도 하는 저렴한 숙소에서 지냅니다.
고급 호텔부터 젊은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저렴한 숙박 시설까지 경험하다 보면 다양한 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서비스도 다르고 고객층도 다르고, 당연히 시설이나 구비된 물품도 다릅니다. 세상의 하늘과 땅, 양 끝을 경험해 보는 사이 여러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비슷비슷한 수준의 것들만 접하다 보면 이런 깨달음은 생기지 않습니다.
먹는 것에서도 뭐든 봐주마 정신을 발휘합니다. 식당에서 먹을 때는 전체 요리와 메인 요리, 디저트와 와인까지 그 지역 것으로 주문합니다.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 프루스트는 반생에 걸쳐 쓴 엄청난 분량의 장편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진정한 여행의 발견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인생의 문장들 , 데구치 하루아키
프루스트가 말한 것처럼 여행은 새로운 시각을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여행을 통해 다양한 좌표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이 변해가는 과정이 재미있어서 과거 위인들은 모두 여행을 떠났는지 모르겠습니다.
프루스트도 젊은 시절 방문했던 베네치아에 무척 매료됐는지 그때의 체험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집필하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여행을 하면서 자기 안에 새로운 시각이 더해지는 맛 때문에 사람들은 여행이 끝남과 동시에 새로운 여행을 또다시 꿈꾸나 봅니다.
유명 관광지를 여행하게 되면 여행 가이드 책은 필수로 챙기지요. 가야 할 곳과 동선을 꼼꼼히 챙겨서 정해진 시간 안에 빠짐없이 명소를 보고 왔을 때 여행 만족도가 높은 분도 있을 겁니다. 반면에 정해진 코스보다는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면서 그곳의 공기를 느끼는 것에 가치를 두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앨리너는 후자 쪽이겠지요. 발길 닿는 대로 걷다 앨리너와 샬롯은 관광객의 노선이 아닌 현지인의 공간으로 들어옵니다. 우리로 치면 두부를 팔듯 포도주를 수레에 싣고 동네 사람들에게 팔고 있는 청년들을 만나고, 사방으로 이어지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길을 잃지만 당황하기보단 모험을 즐기기로 합니다.
융통성 없고 고지식한 샬롯이 당황해 여행서를 꺼내자 보지 말라며 "낯선 도시의 두 여인, 이런 게 모험이에요. 발 닿는 대로 가요" 라면서 오히려 설레는 표정까지 짓습니다. 익숙지 않은 냄새에 인상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것 또한 그 도시에서만 맡을 수 있는 고유의 냄새라며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앨리너를 보면서, 저런 사람이 여행 메이트가 되면 여행 안내서 밖의 세상을 많이 경험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좋은 여행은 사람의 인생관도 바꾼다고 합니다. 아무리 가까운 길이라도 가지 않으면 닿지 못하고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루지 못한다고 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여행'이란 단어가 설렘이 됐습니다. 뭐든지 제약이 들어오면 그 가치가 소중해지는 것처럼 코로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시절도 무척 기다려집니다. 일상으로의 완벽한 복귀 안에 여행 리스트를 차고 차곡 적어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