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동지는 12월 22일 오늘이다. 기상청 예보대로 오늘이 올 들어 최고로 춥다. 베란다 최저 온도가 힘든 식물들은 본격적인 추위가 닥치기 전 거실로 자리를 옮겨줬다. 그러고 보니 베란다에서 추위와 맞서고 있는 식물들이 참 의연해 보인다. 작은 파동에도 흔들림 없는 삶의 주인공 같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겨울 산책'을 읽으면서 계절과 시간, 날씨에 따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산책이 즐거워졌다. 레미를 위해 시작한 산책이었지만, 레미가 아니었으면 가지 않았을 곳이 산책 코스가 돼버렸다. 시간 대비 효율성을 중시하지 않는 사람이 돼버렸다.
소로는 1817년에 태어났으니 206년 전 사람이다. 정약용이 1818년에 목민심서를 완성했던 시기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 시대감이 느껴질까. 소로는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일정한 직업 없이 다양한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다 , 1845년 27세 3월에 월든 호숫가로 들어갔다. '내 삶을 떠받치는 모든 배경지식을 제거하고 나서도 나는 나일 수 있을까.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 말했던 소로는 소신대로 삶을 살았다. 내 삶을 떠받치는 모든 배경지식이 제거된 뒤의 나는 어떤 사람으로 규정지어 질까? 오롯이 나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질문이다.
레미와 산책할 땐 속도를 레미에게 맞추다 보니 한곳에서 오래도록 서있을 때도 많다. 그럴 때 지루함을 느낄 때도 많았는데, 소로의 '겨울 산책'을 읽고 난 뒤 주변의 풀, 나무, 가지, 낙엽,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하늘빛, 석양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 바람과 낙엽의 조화, 가지에 앉았다 비상하는 새들, 서서히 변해가는 나뭇잎의 채도 등 다양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물이 눈에 보이지 않는 건 우리 시선이 닿는 곳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눈이 그쪽으로 가지 않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풍경은 우리가 그 가치를 알아볼 준비가 되어 있는 만큼만 보인다..
'우리는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열심히 생각할 때 비로소 그 대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다른 것은 거의 보이지 않게 된다. 내가 식물 관찰 산책에 나설 때에는 먼저 그 식물에 대한 이미지나 생각에 사로잡힌다.'
'이렇게 해서 나는 스무 종이 넘는 희귀 식물을 찾아내어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사람은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만 본다. 풀 연구에 빠진 식물학자는 넓은 초원에서 있는 참나무를 알아보지 못한다'
아름다움을 사냥할 때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움이 출몰하는 철과 장소와 날개 색을 미리 알지 못하면 해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도 아무것도 잡지 못할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겨울 산책' 중에서
늘 무심히 지나쳤던 아파트 정원수들. 12월의 산수유나무와 모과나무가 얼마나 앙증맞고 고고해 보이는지 알게 됐다. 그전까지 12월이면 열매가 달린 나무를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모과나 산수유나무는 12월까지 잎을 다 떨구고도 열매가 전구처럼 매달려 있다. 그 열매가 아니었음 그냥 사람들에게 대명사 나무로만 불렸을 텐데.
크리스마스 장식이 얹힌 것처럼 너무나 앙증맞은 산수유나무. 까치밥처럼 겨우내 새들의 먹이가 돼주고, 가지마다 영글게 매달려있는 산수유 열매는 그야말로 겨우내 불 밝히고 있는 빨간 꼬마전구다. 모과나무는 또 어떤가. 매년 그 자리에 있었음에도 초겨울이 돼 열매를 맺고 나서야 사람들에게 이름이 호명되는 모과나무. 모과나무가 4월이면 꽃을 피운다는 것도 이번에야 알았다.
꽃이 진 자리에서 열매가 맺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전까지 내게 꽃은 꽃이요, 나무는 나무였을 뿐이었다. 봄의 초대장으로 상징되는 3월의 산수유 꽃, 그 꽃이 진 자리에 빨간 산수유가 열린다는 것도 연관해서 생각해 보질 않았다. 지금 보니 혹독한 겨울을 견뎌낸 산수유 열매가 전쟁터에서 이기고 돌아온 승전병처럼 보인다.
12월의 겨울. 모든 것이 파장한 듯한 느낌, 연말 연예 대상처럼 뭔가 결산을 해야 되는 듯한 이 시기. 한 해의 대차대조표를 펼쳐놓고 점수를 매겨야 될 것 같아 마음이 무거울 수 있는 이 시점에 산수유나무를 보면서 생각의 전환을 가져본다. 봄과 겨울의 상징인 꽃과 열매가 함께 있는 것을 보니 모든 것은 상생이고 순환이란 생각을 해본다. 부족한 오늘을 포기하지 않을 때 더 채워질 내일이 있다. 지도를 펼치고도 엉뚱한 길로 헤매고 다녔던 올 한 해. 그래서 나를 더 들여다볼 수 있었던 시간. 진정한 세상의 중심을 내 안에서 발견하기 위해 월든으로 떠났던 소로처럼 우리도 나 자신의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고 사유하는 나만의 월든을 만들어 보는 새해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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