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행위는 타인을 위로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피에르 쌍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얘기하고 있다. '타인의 말을 들어줌으로써 그를 최고의 상태에 이르게 하며,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사람과 그 말을 진지하게 들으려는 사람의 만남은 기대하지도 못했던 기분 좋은 사건이라고 한다.
공감이 가지 않는 남의 이야기를 그의 입장에서 들어준다는 것, 그리고 그 말에 진심이 담긴 위로와 조언을 해준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생각이 다르면 '말이 안 통해'라고 선 긋기가 먼저인 세상에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 나미야 씨의 경청은 픽션임에도 큰 위로를 안겨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때 모하비 사막에는 공중전화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사막에 있는 공중전화번호가 공개된 뒤 많은 사람들이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 지상에 단 한 명도 없다 느껴질 때 사람들은 사막의 공중전화에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아득하고 먼 존재를 향해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것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막상 어디에도 물어볼 곳이 없을 때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때 누군가 지혜로운 조언을 건네주고, 괜찮다, 아무 일도 아니다, 누구나 겪는 일이다, 다 지나간다는 말을 건네준다면 고통의 순간이 성장의 시간으로 바뀔 듯싶다.
1969년의 나미야 잡화점
1980년의 나미야 잡화점
2012년 나미야 잡화점
나미야 잡화점에서 만난 과거와 미래의 청춘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는 방황하는 청춘들이 많이 등장한다. 히로키 류이치 감독은 이 작품의 테마가 스스로의 목표와 꿈을 찾는 것이라고 했다. 현재 많은 청년들이 각자 구체적 상황은 달라도 꿈을 꾸기 힘든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보면서 스스로를 한 번 더 되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는 말을 덧붙였다.
2012년 한밤중 세 명의 청년은 자신들이 성장한 고아원을 없애려 하는 한 여성의 집을 털기로 한다. 오해로 인해 시작된 범죄로 청년들은 한 낡은 집으로 피신을 하는데, 그곳이 '나미야 잡화점'이다. 1980년에 문을 닫아 이젠 폐가처럼 변한 '나미야 잡화점'은 1960년대부터 1980년까지 그 동네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고민 상담소 같은 곳이었다. 초등학생 꼬마가 청년이 될 만큼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나미야 씨는 췌장암 선고를 받고, 유언 같은 말을 아들에게 전한다.
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상담에 답장을 보냈어
어쩌면 ... 상대방은 내가 답장을 보낸 대로 하다가
불행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그렇게 됐으면 어떡하지?
최근 들어 매일 밤 기묘한 꿈을 꾼단다.
누가 우리 가게 셔터의 우편함에
편지를 집어넣어.
나는 어딘가에서 그걸 보고 있고
더구나 그건 지금이 아니라
훨씬 나중의 일이야.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후의 일이지.
셔터의 우편함에 편지를 집어넣는 건
예전에 내게 상담을 하고
답장을 받은 사람들이야.
자기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내게 알려주는 거지.
이건 단순한 꿈이 아니야
난 알아... 그러니까 내가 가게에 가면
그 사람들의 편지를 받을 수 있어.
그러니까 얘야 나를 가게에 데려다 주거라
내가 병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생각하니?
난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이게 내 마지막 부탁이다.
가게에 데려가다오.
나미야 잡화점에 숨어든 세 명의 청년은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전 주인의 낡은 물건을 뒤적이다 이곳이 손님들에게 무료 상담을 해준 곳이라는 기사를 발견한다. 그때 잡화점의 낡은 셔터 우편함으로 한 장의 사연이 도착한다. 청년들이 살던 2012년과 나미야 씨가 상담 편지를 써주던 1980년은 이렇게 해서 만난다. 그리고 그 열려진 시간 속에서 1980년의 청춘들과 2012년의 청춘들이 만난다. 폐점한 낡은 잡화점이 현재와 과거를 잇는 일종의 타임머신이 된 것이다.
나미야의 첫사랑 아키코
과거로부터 온 편지를 호기심에서 답장을 해주며 '달나라 토끼', '생선가게 뮤지션', '그린 리버', '폴 레논', '길 잃은 강아지' 의 고민이 소개된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들은 나미야 잡화점 인근의 고아원 '마루코엔'과 모두 얽혀 있다. '마르코헨'의 설립자가 잡화점 주인 나미야 유지의 첫사랑 아키코다. 서로 사랑했지만 신분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이들은 이별의 아픔을 겪는다. 전생의 인연처럼 영화는 마르코헨과 관련된 사람들이 나미야 잡화점을 통해 고민을 전달하고 이곳에서 응원 같은 조언을 듣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청춘의 성장 기록
고아원 '마르코헨'에서 성장한 아츠야, 쇼타, 코헤이에겐 자신들의 진로나 고민을 상담할 어른이 곁에 있질 않아 현실에 대한 좌절을 겪고 있는 중이다. 그런 청년들이 우연히 2012년의 나미야 잡화점에 숨어들면서 고민 상담 편지에 답장을 해주게 되고, 그 과정에서 꿈과 희망 없이 살아가던 1980년, 2012년의 청춘들은 조금씩 성장하게 된다.
2012년의 아츠야와 쇼타, 코헤이가 처음으로 답장을 해줬던 편지의 주인공은 1980년의 생선가게 뮤지션이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생선가게 뮤지션의 청춘도 힘겹다. 음악의 길을 가기 위해 대학까지 중퇴했는데, 생선가게인 가업을 이어가던 아버지가 쓰러지고, 그 과정에서 꿈을 선택해야 될지 가업을 이어가야 되는지 고민하게 된다. 그린 리버라는 여성의 고민도 막막하다. 아이를 가졌지만 홀로 어렵게 아이를 낳아서 키워나갈 자신이 없다. 예명 길 잃은 강아지를 쓰는 하루미는 자신을 키워준 은인에게 보답을 하기 위해 낮엔 직장에 나가고 밤엔 술집에서 일을 하는데,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유혹적인 제안에 고민을 한다.
이렇듯 1980년의 청춘과 2012년의 청춘들은 '나미야 잡화점'을 통해 조우한다. 일본에서 2012년은 아베 총리가 인위적으로 돈을 풀어서라도 경기를 부양시켜보겠다는 '아베노믹스'를 시행한 해다. 잠깐 효과가 있었지만 돈은 좀처럼 돌지 않았고, 사람들은 한번 닫은 지갑을 열지 않았다. 이런 일본 경제의 침체는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됐다. 성장밖에 모르던 일본에서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고, 자산 가치가 떨어지자 사람들은 소비와 저축을 줄였으며, 내수 부진과 장기적인 엔고는 기업의 경쟁력 약화를 불러왔다. 자연히 고용 환경도 나빠졌다. 2012년 현재를 살고 있기에 청년 코헤이는 '길 잃은 강아지'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담은 답장을 해준다.
당신이 나를 믿고 조언에 따른다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겠습니다.
길 잃은 강아지님
남의 애인이 되면 안 됩니다.
몇 년 후에 일본의 경기는 무척 좋아집니다.
일단 착실하게 일하세요.
그리고 경제에 관해 철저하게 공부하세요
돈이 조금 모이면 시내에 작은 아파트를 사세요
반드시 가격이 오릅니다.
그러면 즉시 팔아서 더 비싼 아파트를 사세요.
그렇게 해서 돈이 모이면
주식이나 골프 회원권을 사세요
그러려면 경제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합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 모든 투자에서 손을 떼세요
2천 년대에 접어들면 휴대폰이나 인터넷이란 게
사회를 크게 바꾸고
지금까지와 달리
새로운 사업이 태어납니다.
저성장 시대를 통과하며 가장 큰 희생을 겪은 일본의 청춘들이 역설적으로 어느 시대에나 자기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했던 청춘들을 불러온다. 그리곤 '나미야 잡화점'이란 판타지적 공간에서 시공을 건넨 상담을 통해 청춘들의 절망을 다독인다. 마르코헨의 세 청년은 나미야 잡화점에서 겪은 판타지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의 행로를 찾아 훌쩍 성장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980년의 나미야 씨가 2012년의 코헤이에게 보내는 편지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세 명의 청년들이 시차를 확인하기 위해 보낸 백지 편지에 32년 전의 나미야 씨가 써보낸 답신이 소개된다. 거기엔 묘한 철학이 스며들어 있다.
이름 없는 아무개 씨에게
당신이 백지 편지를 보낸 이유를
할아범 나름대로 생각해 봤습니다.
생각건대 이 하얀 백지는
지금 당신의 마음이 아닐까요?
당신의 눈에는 자신의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디 좌절하지 마십시오.
부디 포기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미래는 아직 백지입니다.
백지이기에 어떤 미래도
그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게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모든 것이 자유롭고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당신의 인생을 후회 없이 불태우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고민 상담의 답장을 쓰는 일은
이제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멋진 상담을 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인생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모두가 비슷한 지점에서 고민하고 비슷한 문제에 힘겨워하고, 비슷한 이유로 외로워할 때 약도를 그려주고, 사전을 펼쳐주고, 해석을 도와줬던 나미야 씨의 편지가 이것으로 마지막 이라니 마음이 휑해졌다. 사람들이 힘들어 할 때 그 신호를 잘 읽어내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한다. 눈빛으로, 문자로, 짜증으로, 호흡으로 , 걸음걸이로 다양하게 힘들다는 신호를 보낼 수 있다. 오늘 나는 어떤 신호를 받고 어떤 신호를 보냈는지. 우리에게도 '나미야 잡화점'같은 공간이 존재한다면, 퇴근 길에, 하교 길에, 집으로 가는 길의 발걸음이 고단할지로도 위로의 답신이 도착할 내일이 있기에 답지 있는 문제를 푸는 기분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