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페미니스트인 29살 여성이 <열녀전> 연재를 왜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글이다. 어쩌다 내가 <열녀전>을 읽게 되었고, 또 왜 그렇게 감명 깊게 읽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조금 지루하겠지만) 우선 내가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되었는지부터 설명해야 한다.
나는 대학교를 자퇴했다. 대단한 계기나 결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이렇게 저렇게 쌓인 시간이 나를 자연스럽게 자퇴의 길로 인도했다. 같은 과에서 연애하던 친구와 헤어졌고, 자취를 하며 대학을 가지 않고도 멋있게 사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학에서 하는 공부가 재미없었다. 단 한가지 수업만 빼고 말이다. <여성과 사회>는 페미니즘 수업이었다. 수업을 들을 때마다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강렬한 충격은 강렬한 추동력으로 이어졌다. 여성의 입지를 좁게 만드는 ‘오빠’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고, 사회에서 부여 받는 엄마의 역할에 반대하며 ‘엄마’라는 명칭을 거부했고, 이성애나 독점적인 연애 대신 다른 방식의 연애를 시도했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페미니스트임을 밝히고 나의 페미니즘적 실천에 동조해줄 것을 요구한 건 겨우 2년 안팍이었다. 2015년, 일명 ‘페미니즘 리부트’가 일어났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페미니스트가 되었지만,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스스로의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의심하게 됐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여러 편으로 갈라져 서로에게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나의 마음을 울리고 내가 동참하고자 했던 페미니즘은 함께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자고,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 상상해보자고 제안하는 것이었기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열녀전>은 7년이 넘게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고민하던 중에 만났다.
중학생 때 옛 동화를 각색한 이야기가 실린 단편소설집 <흑설공주>를 읽은 적이 있다. 그중 단편 <흑설공주>에는 하얗고 가녀린 백설공주 대신 마음씨 착한 흑설공주가 등장한다. 흑설공주를 위험에 빠뜨리는 건 계모가 아니라 욕심 많은 귀족이고, 위험에 빠진 공주는 왕자가 아니라 계모의 도움과 보호를 받는다. 소설에서 흑설공주를 해치려고 한 귀족은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그때 앙금을 품은 귀족이 <백설공주>를 지어낸다. 그러니까 공주와 계모 왕비가 사실은 서로를 응원하고 아끼는 연대 관계였으며, 이를 질투한 남성이 그들을 모함하기 위해 <백설공주>라는 이야기를 썼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ㅍ’도 들어본 적 없는 때였지만, <흑설공주>를 읽으며 묘한 짜릿하게 짜릿한 느낌을 받았다.
<열녀전>을 읽을 때도 비슷했다. 사실 처음부터 동양고전에 호의적이었던 건 아니었다. 페미니즘을 배우면서 가부장제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전통 문화에 막연한 거부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여성은 동등한 주체가 되기보단 하대당하기만 했으하며, 일종의 부속품처럼 다뤄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미나에서 함께 <열녀전>을 읽으면서 나는 가장 먼저 <흑설공주>를 떠올렸다. <열녀전>은 <흑설공주>와 같은 의도를 가진 책은 분명 아니다. 어쩌면 이 책을 편집한 남성 저자는 특정한 방식으로 여성을 그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녀전>에는 나의 오랜 편견과 다르게 여성의 말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남성과 남성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여성이 없었다. 또 ‘여적여’ 하는 새엄마나 새언니도 없었다. 대신 남성보다 현명한 여성, 남성에게 뼈 아픈 조언을 하는 여성, 여성을 돕는 여성이 있었다.
<열녀전>의 저자 유향은 전한시대 사람이다. 그는 여러 이야기를 모아서 편집하는 방식으로 책을 썼는데, <열녀전>도 그중 하나다. <열녀전>에 등장하는 어떤 이야기는 <춘추>, <시경>, <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또 어떤 이야기는 어디서도 확인할 수가 없다. 그래서 <열녀전>의 어떤 이야기들은 민간에 전승되는 이야기가 실린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래서 <열녀전>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여성들의 이야기가 늘어져 있다는 뜻의 제목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열녀전> 곳곳에서 과거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재밌는 상상을 해볼 틈을 발견했다. 만약 중학생 때 <흑설공주>와 함께 <열녀전>을 읽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처음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열녀전>도 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어떤 책들은 주변에 소개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퐁퐁 솟게 만든다. 나는 내가 <열녀전>을 읽으며 발견한 흥미로운 지점을 친구들과 함께 읽고 싶다는 마음으로 무작정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열녀전> 글쓰기가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동안 만나는 모든 여자친구들에게 <열녀전>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녔다. 친구들은 내가 해주는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이해했으며 흥미를 보였다. 어디 가면 <열녀전>을 읽을 수 있냐고 묻는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니 금방 난관에 봉착했다. 우선 나의 동양 고전 공부가 짧다는 게 큰 걸림돌이 되었다. <열녀전>에는 <사기>와 <시경>을 비롯한 다양한 텍스트가 중간에 삽입되어 있다. 대부분의 동양 고전 텍스트가 사용하는 저술 방식이다. 때문에 동양 고전은 다양한 책을 많이 읽을수록 해당 글에 대한 이해도가 크게 높아진다. 내가 공부한 양으로는 <열녀전>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문맥 안에 삽입된 사람들의 생활상을 캐치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열녀전> 세미나를 통해 이 부분을 조금이나마 보충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과거 사료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오늘날의 시각으로 과도한 해석을 할 위험이 있어 보였다.
또 <열녀전>을 편집한 유향은 책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는 학자이자 정치인이었다. 물론 자신이 상상한 사회를 구현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책은 (여느 책이 그러하듯)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열녀전>이 편집되던 당시와 오늘날은 상황이 많이 다른데, <열녀전> 속 여성의 모습을 오늘날과 연결시켜서 쓸 수 있을까? 내가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했다고 말해도 되는걸까? 심지어 이미 한국 한문 전공자들이 <열녀전>이 여성의 열악한 사회적 위치를 보여준다며 비판적으로 접근한 연구 결과가 존재한다. 그런데 그런 책을 두고 나같은 비전공자가 “저는 그렇게 안 읽었습니다만.”하고 말할 수 있을까?
글을 쓰면서 이 문제들을 얼마나 해결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위험을 감행하며 글쓰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 정말 친구들과 함께 <열녀전>을 읽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페미니스트인지 고민하다가 <열녀전>을 읽었을 때,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길은,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길은 작은 단서에서부터 시작한다. <열녀전>은 오래되었지만, 오래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단서가 되어줄 수 있다. 나는 이 책에서 꼭꼭 숨어 있는 작은 단서를 찾아내고, 그로부터 오늘날 사회의 모습을 조금 다르게 상상해보고 싶다. 혹은 이 연재로 그것을 함께 시작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이 힘을 갈고닦고 발휘하는 것이 내가 페미니즘으로 하고 싶은 일이자, 친구들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