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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하는 여자들

<열녀전> 정순편, 위종이순


1. 여성들의 서바이벌


    <열녀전>의 소제목에는 각 장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이 들어가있다. 가령 앞선 <현명전>은 현명함‘賢’과 명석함‘明’이, <인지전>은 어짐’仁’과 지혜로움‘智’이 핵심 내용이었다. 나는 두 장을 읽으며 내심 만족스러웠다. 남성을 칭송하는 데 사용될 법한 단어들인 현, 명, 인, 지가 여성에게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 장이었다. 4장은 <정순전>으로 정절‘貞’과 순종‘順’이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었다. 정절과 순종은 모두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닌가? 내용을 살펴보기도 전에 거부감이 들었다.


    <열녀전>을 함께 읽은 세미나에서는 돌아가면서 강독을 맡는다. 보통 강독을 지도해주시는 선생님께서 다음 순서를 지목하시는데, <정순전>의 강독 순서에 내가 지목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정면돌파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정순전>을 한 호흡으로 읽어나갔다. 처음엔 제목을 보고 가졌던 선입견만큼 <정순전>에 실린 이야기들이 당황스럽게 느껴졌다. <정순전>에는 남편과 사별하고 재혼을 거부한 여성들, 마땅한 예법에 맞지 않다고 혼인을 거부하거나 불길이나 물난리 속에서도 꼼짝 않고 자리를 지켰던 여성들을 높이 샀다. 가부장제에 희생당한 전형적인 여성 인물 레파토릭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비뚤어진 마음으로 책을 읽는다면 당시의 시대적 맥락을 놓치기 쉽다. <열녀전>에는 가부장제로 다 포착되지 않는 이야기가 숨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읽다보니 <열녀전>에서 재혼을 권하는 이들은 친정 엄마나 친가에서부터 함께 자란 부모傅母(<부모를 아십니까> 참고)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고대 혼인은 집안 간의 결합이었기 때문에 여성의 재혼은 전혀 이상하게 비춰지지 않았다. 따라서 가문에서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한 방편인 재혼을 거부한다는 것은 오늘날과 다르게 당대의 보편적인 풍습을 거부하는 진취적인 행위였다고도 볼 수 있다.


    예법에 맞지 않다고 난리통에서 이동을 거부한 여성들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사실 예법과 명분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건 비단 여성들만은 아니었다. 고대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목숨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었다. 게다가 예법과 명분은 그 어떠한 방법보다도 자신을 지키고 지위를 격상시킬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는 점도 고려해봐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정순전>은 고대의 여성들이 실제로는 죽을 위험에 처할지언정 자신의 사회적 입지 확보하기 위해, 그러니까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 이야기라고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성들이 치열하게 서바이벌한 흔적인 셈이다.


    그중에서도 나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았던 건 여성 둘이 함께 서바이벌에서 살아남은 이야기였다.  






2. 두 부인의 한바탕 소동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두 여자는 위나라 종실의 부인들이다.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하는 과정에서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영왕으로 하여금 지위를 격하시켜서 제사를 받들게 했다. 영왕이 죽자 그의 아들이 주군이 되었다. 문제는 그 아들이 정부인의 자식이 아니라 첩의 자식이었다는 데 있었다. 정부인에겐 아들이 없었다. 정부인에게도 첩에게도 굉장히 애매한 상황이다. 아무리 첩이라고 해도, 예법에 따르면 그녀는 지금 주군의 생모이니 남을 섬기지 않는 것이 도리이다. 그러나 정부인과 첩의 관계에서 첩은 정부인을 모시는 것이 도리이다.


    이둘은 어떻게 대처하였을까? 첩은 자신의 아들이 주군이 된 뒤에도 정부인을 모셨다. 결국 정부인은 첩에게 자신이 아들이 없어서 쫓겨날 사람인데 이렇게 절개를 지키며 살 수 있어서 다행이긴 하나, 이런 상황이 잠시도 편안하지 않고 마음 속으로는 부끄러움을 느낀다며 친정에 가서 살테니 이따금 한번씩 만나자고 이야기한다. 첩이 정부인을 어찌나 극진히 모셨는지, 이 둘의 사이가 어찌나 돈독했는지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첩은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은 정부인이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왔고, 정부인은 그런 첩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자진하여 나가겠다고 하면서도 이따금씩 얼굴을 보자는 말을 덧붙인다.



    그러자 첩은 울면서 우리의 집안에 불행한 세 가지 일을 저지르게 하려고 하냐 묻는다. 남편인 영왕이 일찍 죽은 것이나 정부인에게는 아들이 없는데 자신에게만 아들이 있는 것 만큼 정부인이 밖에 나가 사는 것도 불행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부인이 뜻을 굽히지 않자 첩은 아들인 주군을 찾아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목숨을 끊으려 하였다. 주군은 자신의 생모를 말리려고 했으나 첩은 듣지 않았고, 결국 정부인이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말을 철회하고 나서야 한바탕 자살 소동이 마무리되었다.


부인이 이를 듣고 두려워 결국 첩의 말을 따라 머물기를 허락하였으며, 목숨을 마치도록 첩은 그를 공양하기에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군자가 말하였다. “두 여인이 서로 양보하니 역시 진실한 군자로다. 실행은 좁은 집 안에서 이루어졌지만 그 명성은 후세에까지 우뚝 설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夫人聞之懼, 遂許傅妾留, 終年供養不衰. 君子曰 : “二女相讓, 亦誠君子. 可謂行成於內, 而名立於後世의矣.”


    이후에 이 두 여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한바탕 소동 덕분에 정부인과 첩은 명분을 문제로 시비가 걸리거나, 곤란한 트집을 잡히지 않으면서 서로를 아끼며, 오순도순 늙어가지 않았을까?  






3. 여성들의 연대


    두 주인공을 가부장제에 희생당한 캐릭터로만 해석하지 않는다면 이야기를 좀 더 풍성하게 읽을 수 있다. 당시 위나라는 통일된 크고 힘 쎈 진나라 옆에서 이름만 남긴 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망한 나라였다. 이 위나라에서 명맥을 잇지 못했지만 정부인으로 궁궐에 남은 여자와 명맥을 이었지만 선왕의 첩이었던 여자, 두 여자 모두에게 궁궐은 안전하지 못한 곳이었을 터이다. 혼인이 집안 간의 결연이었음을 생각해보면 두 여자에게는 각각 자신을 지탱해주거나 자신에게 기대고 있는 집안이 있었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정부인은 명맥을 잇지 못해 집안의 위세가 떨어지게 되었기 때문에 궁궐에서 압박을 받았겠지만, 그래도 정부인은 정부인이다. 첩의 집안에게 정부인 혹은 그 집안은 위협이 되었을 것이며, 첩 역시 궁궐에서 이 문제로 인해 압박을 받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두 여자의 관계가 어떤지와 상관 없이, 또 두 여자의 성품이 어떠한지와 상관 없이 상황이 두 여자 모두 숨막히는 상황이었을 게 눈에 선하다. 정부인이 궁궐을 나가겠다는 의사를 밝힌 데엔 이러한 배경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정부인이 궁궐 밖으로 나가겠단 결단을 내린 것도, 그리고 그 결단에 반대하여 첩이 한바탕 소통을 벌인 것도 결단력 있고 현명한 처사였다. 정부인은 자신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첩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끼며 이 권세 다툼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지만, 첩이 이를 붙잡음으로써 상황은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가겠다고 강경하게 주장했다가 발목 잡힌 정부인에게, 또 정부인을 내보내지 않겠다고 자살 소동을 벌인 첩에게 그 누가 이 둘의 문제를 거들먹거리며 압박을 가할 수 있었을까? 한바탕 소동 덕분에 이 둘은 더이상 주변에서 압박을 받거나 위협적인 상황에 노출되지 않고 오순도순 늙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연재의 마지막 글을 쓰며 돌아보니, 그동안 유독 여성들이 두 명 이상 등장한 이야기를 글의 소재로 많이 삼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성들이 연대하는 이야기를 보면 한 번 더 읽어보게 되고,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옛 이야기라고 하면 대개 여성들이 질투하고 시기하고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는 이야기가 많을 것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오히려 <열녀전>에서는 그런 류의 서사를 찾는 게 더 힘들다. 어떤 글에는 여성들의 연대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때때로 이글처럼 전면에 그들의 관계성이 드러나는 이야기도 있다. 후자의 경우에 여성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맞서 싸우는데, 그럴 때 혼자서 망망대해를 건너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여성들과 동지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여전히 나의 여성 동지들과 함께 이런 옛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부족하고도 짧았던 연재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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