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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리 May 12. 2016

재수생의 알코올

feat. 캘빈 해리스의 병나발

재수생활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공부를 못해서 시작한 것도 아니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난 현역 때 운이 별로 좋지 못해서 이른바 '원서질'에 실패했는데, 내가 다니던 강남의 모 학원은 사실 그런 실력 좋고 억울한 아이들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정말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원래 공부만 하던 애들이어서 다들 성격이 특히 모나지도 않았고, 학원 위치가 위치인 만큼 돈 깨나 굴리는 집안 자제들이어서 얼른 체면을 살리기 위해 학원에서도 공부만 열심히 하곤 했다. 7월쯤 되니 그런 분위기도 약간은 풀어져서 같은 반 애들끼리 노래방을 가기도 하고, 의무야자를 몰래 빠져 나와 외식을 하면서 기분을 내기도 했었다.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학원 앞 교대 운동장에서 맥주 한 캔 씩을 마셨던 것. 현역으로 대학을 간 친구들이 아주 가끔 학원에 찾아와 밥을 사는 일이 있었다. 그 애들도 눈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 아무렇지 않은 척 우리(재수생)를 대하다가도 대화를 하다보면 문득 문득 대학 생활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내 사정을 봐서 그런 건 얘기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말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것도 우습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웬만하면 내년에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을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오히려 "야, 너희들 학교 다니는 얘기 좀 해봐" 하면서 먼저 그들의 생활을 물어보곤 했다. 그제서야 친구들은 과 선배가 얼마나 자기한테 귀찮게 구는지, 동기 누구는 술버릇이 이렇게나 안 좋다든지, 다른 과에 누구가 알려준 맛집이 정말 괜찮으니 나중에 같이 가면 좋겠다느니 같은 얘기를 주섬주섬 꺼내곤 했다. 


그런 얘기를 들은 날에는 어쩐지 가슴이 뻐근해진 것도 사실이다. 학원에서 허락하는 잠깐의 저녁 시간에 그렇게 친구들을 만나고 나면, 그 날의 야자는 손에 잡히기가 어려워 옆에 앉은 친구를 살살 꼬드겨 밖으로 나갔다. 공부를 방해한 건 나니까 편의점에서 맥주 정도는 내가 사야지. 아직 술을 제대로 배워보지도 진탕 마셔도 보지도 못해서 내가 고르는 술은 항상 술 같지도 않은 레몬 맥주였다. 친구는 꼭 같은 브랜드의 블루베리 맛 맥주를 골랐다. 


그렇게 음료수 같은 알코올과 감자칩 같은 과자를 들고 교대 운동장으로 향한다. 작은 트랙을 가볍게 뛰는 동네 주민. 살살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노부부. 모래밭에서 저희들끼리 노는 아이들.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잘 보이는 돌계단에 앉아서 일부러 딱 소리를 내며 맥주캔을 땄다. 별로 취할 일도 없는 술인데 우리는 또 일부러 술 냄새를 팍팍 풍기는 척하며 숨을 깊게 내쉬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여름의 초저녁에 부는 바람과 거기에 섞인 미생물의 냄새와 그날 귀동냥으로 들은 대학생활에 취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맥주를 마시며 친구와 나눈 대화는 너를 만나기 전-그러니까 재수를 하기 전까지- 나는 어떻게 살았고 친한 친구는 누가 있고 이런 음악을 좋아하고 대학에 가면 이런 전공을 하고 싶고 뭐 이런 것들이었다. 


집에 갈 때는 꼭 음악을 들었다. 집이 학원에서 먼 탓에 꼭 셔틀버스를 탔어야 했는데 1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그냥 가기에는 좀 심심하지 않은가. 쓸 수 있는 데이터도 한정되어 있는 슬픈 재수생이었기에 음악은 스트리밍이 아니라 다운받은 노래들로만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술을 마신 날에는 반드시 Drinking from the bottle 이라는 노래를 들었지. 지금도 좋아하는 Calvin Harris라는 아티스트의 노래인데 아직도 노래 제목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재수생 때에는 뭐 드링킹이랑 보틀이랑 같이 있으니까 병나발 부는 노래인갑다 라고 생각하고 들었다. 오늘은 술 마신 날이니까 꼭 들어야지. 사운드도 화려하고 베이스도 펑펑 잘 터져서 올림픽대로를 타는 버스에서 한강의 야경을 배경으로 듣고 있자면 뭔가 코가 간질간질해지는 노래였다.

 


아니 재수를 그럭저럭 잘 마치고 대학도 어찌저찌 들어온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그 때 그냥 코가 간질간질했던 게 아니었던 것 같다. 왠지 자꾸 눈물이 나니까 코가 간질간질했던 것이다. 재수생활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했지만 매일 나쁘지 않을 수만은 없었다. 왜 나는 작년과 똑 같은 일년을 한번 더 반복해야 하는지 불만이었고, 왜 나는 작년에 하필 그 학교 그 과를 썼는지 후회였고, 그렇다고 내가 올해는 대학을 갈 수 있을지 매 순간 불안이었다. 쿨 할래야 쿨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그런 인간이었다. 친구들이 와서 대학 생활 얘기를 머뭇거리는 것이 왠지 모르게 자존심을 건드려서, 괜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 먼저 애기해보라고 운을 띄웠지. 이런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무리하다가 엄한 친구를 꼬드겨 하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며 뒷수습을 하고,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속이거나 혹은 다독이기 위해서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병나발 분다는 의미불명의 노래를 들어댄 거다.



지금은 내가 그 운동장에서 어떤 브랜드의 맥주를 마셨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지만 이 노래만큼은 내 달팽이관에 선명한 것이 다행이다. 그 때 그렇게 혼자서 마음 속으로 끙끙 앓던 녀석을, 고작 1년 고생했다고 다 잊어버리기에는 너무 쓸쓸하잖아. 대학생이 된 지금 재수생 때에는 상상도 못 하던 온갖 나라의 온갖 맥주를 섭렵할 수 있던 건 결국 그 녀석 덕분이다. 그러니까 가끔은 그 노래를 일부러라도 찾아 들어주면서, 혼자 서울 야경을 보며 코를 간질이던 녀석을 생각해줘야지. 노래를 들으면서 먹을 맥주는 레몬 맥주가 좋겠다. 브랜드는 아무 것이라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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