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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리 Sep 28. 2018

저녁을 준비하는 것만으로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면

<어제 뭐 먹었어?>


요리에 취미는 없습니다. 레시피를 검색하고, 필요한 재료를 사고, 팩에 담긴 재료를 찍거나 통에 담긴 재료를 열고, 그것들을 섞거나 썰거나 끓이고, 분명 밥은 한 접시에서 먹었지만 그것보다 다섯배는 많은 설거지 감을 처리하고...이 일련의 과정을 견디기에는 저라는 사람의 귀찮음이 더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이거 하나 만들고
설거지가 이만큼 나오는 인간...

그래도, 요리하는 사람의 기분을 아주 조금 이해할 것 같은 일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오후 내내 카페에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늘 저녁은 뭘 먹나 잠깐 고민을 했습니다. 밖에서 사먹기에는 이번 달 엥겔 지수가 너무 높고, 집에 있는 라면을 끓여먹자니  건강을 챙기고는 싶습니다. 이러저러한 생각을 넘기다 문득 며칠 전에 사두고 냉장고에 절반 정도 남겨둔 상추가 떠올랐습니다. 매일 냉동고에 며칠 분은 쌓여 있는 닭가슴살도요. 아하, 닭가슴살 대충 데워 대충 썰어 대충 쌈싸먹으면 되겠구나!


그리고 집에 가서  생각했던 바와 같이 저렇게 대충 해먹었어요. 그런데, 정말 대충인데도 왠지 기분이 막 좋아지는 겁니다.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 현황을 알고 있는 내가 대단해보이고, 신선 식품을 썩하지 않고 유통 기한 안에 해치운 게 알뜰살뜰해보이고, 섬유질과 단백질의 밸런스를 맞춰서 저녁을 해결한 것이 철두철미해보였어요. 고작 상추에 닭가슴살로!


<어제 뭐 먹었어?>의 주인공 카케이 시로는 파트너와 둘이 삽니다. 요리 담당을 맡은 시로 씨는 매일 저녁 그 날 해 먹을 저녁 거리를 마트에서 사서 돌아옵니다. 저녁 메뉴는 그때 그때 다르죠. 마침 마트에서 싸게 파는 것들을 둘러보다가 메뉴를 결정하기도 하고, 출근하기 전 파트너가 먹고싶다고 한 메뉴로 장을 보기도 합니다. 어떻든 간에, 그 날 먹을 저녁을 그 날 저녁에 한다는 원칙은 대체로 깨지지 않아요. 구상해둔 저녁을 다 준비하고 나서 시로 씨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저녁준비는 정말 대단해. 일을 말끔히 마무리 지었을 떠나 느끼는 보람을 하루에 한 번은 맛볼 수 있으니..."



1즙 3채는 기본이요 잼과 크레이프까지 직접 만드는 시로 씨의 수고에 비해 저의 닭가슴살 상추쌈 저녁 상의 수고는 정말 보잘 것 없습니다. 신맛과 단맛의 밸런스를 생각해 반찬을 배분하는 센스에 비해 저의 영양학적 소견 역시 견줄 바가 못 되죠. 하지만 시로 씨의 저 독백을 읽는 순간 저는 단번에 닭가슴살 상추쌈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제가 느낀 감정이 무엇인지도 분명해진 것입니다. 내가 먹을 음식을 내가 구상하고 준비한 것에 대해 느꼈던 감정, '뿌듯함'입니다.


직장인이라면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옵니다. 그 일은 하루만에 기승전결이 끝나는 일일 수도 있고, 며칠 몇 주가 걸리는 프로젝트일 수도 있습니다. 일이 깨끗하게 끝나면 그 보람은 참 더할나위 없겠지만, 정성과 시간을 공들였음에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일도 꽤나 있어요.


그런 점에서 식사 준비는 가장 빠르게 그리고 가장 확실하게 행복감을 주는 행위입니다. 나를 위한 행위는 사실 여러개 개 더 있습니다. 방 정리도 있고 운동도 있죠. 그런데 방 정리는 왠지 깨끗한 게 기본 값이 것만 같아, 청소를 하면 개운하긴 하지만 0에서 +가 됐다기 보다는 -에서 +가 됐다는 느낌이 들어요. 운동은 내 신체를 위해 가장 좋은 행위인 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알지만...네...다들 어떤 느낌인지 알잖아요. (ㅎㅎ)


식사 준비는 일단 맛있는 결과물이 확실하게 보장됩니다. 사람의 3대 욕구 식욕 식욕 수면욕 중 식욕이  확실하게 채워지는 거죠. 내가 나를 위해 준비하는 거니까 내가 먹고 싶은 걸 무조건 먹을 수 있습니다. 랜덤게임을 걱정할 필요도 복불복을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먹고 싶은 걸 직접 준비하고 그걸 먹는 것만으로도, 내가 생각한 행복이 확실하게 내 안에 저장됩니다.


단지 저녁 준비를 하는 것만으로도 뿌듯해질 수 있다면, 그래서 하루에 한 번은 반드시 뿌듯해질 수 있다면, 그렇다면 전 오늘도 냉장고에 뭐가 남았는지, 내가 뭘 먹고 싶은지 생각을 하면서 가보겠습니다. 오늘은 뭘 먹고 뿌듯해져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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