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2
1.
며칠 전에 만화 <식객>을 다시 정주행해볼까 해서 1권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에피소드 3개 쯤 읽고 다시 고이고이 덮어두었습니다. 실로 몇 년 만에 마주한 이 식도락 만화에서, 제가 감당하기엔 식도락 이외의 (불편한) 것들이 너무나 많이 나왔기 때문....
2.
한식의 훌륭함을 강조하는 것쯤이야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하지만 한 대접에 몇 사람의 숟가락이 풍덩풍덩 들어가고 술잔을 돌려가며 마시는 풍습(?)의 비위생보다, 공동체 의식 함양의 긍정적 효과에 더 큰 방점을 찍는 것부터 슬슬 느낌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제일 먹고 싶은 것은? 이라는 질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한국 여자'라는 농담(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을 섞고, 조미료를 넣었다고 지랄지랄 아니 난리난리를 피우는 남자주인공을 보면서 느낌은 확실해졌습니다. 무슨 느낌인고하니, 아 이 만화 추억 보정으로 덮기에는 좀 너무하신데?라는 느낌입니다.
3.
같은 장르는 전혀 아니지만, <H2>는 이 느낌에서 살짝 비껴난 책입니다. 국내에서는 델리스파이스의 노래 <고백>에 모티브가 된 것으로 유명한 이 만화는 고교 야구 와 고교 연애를 아주 적당한 비율로 쓰까놓은 작품이죠. 작가인 아다치 미츠루는 <H2> 외에도 <터치>, <러프> 등 고교스포츠(야구, 수영) + 고교 연애를 버무려놓은 작품을 많이 내놨습니다. 다작한 만큼 설정이 비슷비슷한 게 많아 자가복제라는 비판도 있는 모양입니다만, 전 이 작가의 작품 중에서는 <H2>를 가장 좋아합니다.
4.
야구하는 남자 주인공들인 '히데오'와 '히로'는 '이미' 야구를 잘하는 사람들입니다. 작품은 고등학생이 된 둘을 조명하지만 그들의 야구적 능력치는 이미 중학생 때 완성되었죠. 때문에 어디 야산에 가서 스윙은 2천 번! 변화구도 2천 번! 하는 식으로 수련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건 '완성형 주인공'을 선호하는 요즘의 만화계 트렌드에 어울리는 설정이죠. <원펀맨>, <세상은 돈과 권력>, <프리드로우>, <약한 영웅> 같은 요즘 만화들은 이미 주인공들이 초장부터 세거나 수련을 하더라도 초반에 바짝 수련하고 빠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H2> 역시 이미 '쎈' 주인공들이 팡팡 상대방을 두들겨가며 고교야구 정점에 이르는 과정에서 재미 요소를 뽑아내죠. 이건 지금 읽어도, 아니 오히려 지금 읽어야 더 재밌는 만화적 특성입니다.
5.
'이미 센 주인공'이 이 만화의 '고교야구적' 재미를 결정지었다면, '소꿉친구'는 '고교연애적' 재미를 담당합니다. 남자주인공 '히로'와 여자주인공 '히까리',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친구였던 이들에게 '소꿉친구'보다 더 어울리는 수사는 없고, 이 수사에서 나오는 그...있잖아요 그 몽글몽글 울렁꿀렁함...그게 참 읽는 내내 읽는 사람을 계속해서 간질입니다. 예전에 수지와 윤두준이 막 데뷔했을 무렵 이 둘을 설명하는 말 중에 하나가, '반에 한 명씩 있을 것 같은 얼굴인데 막상 보면 절대 없는 얼굴'이었거든요. 전 이 말이 그대로 '소꿉친구'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에도 한 명쯤 있을 것 같은데 절대 없어요. 그래서 '소꿉친구'라는 키워드는, 상상하기 쉬우면서도 부재를 충족시키자 하는 욕구(?)를 해소하기에 아주 적절하죠. 덕분에 소꿉친구는 만화계에서도 고리타분한 것 같으면서 계속해서 쓰이는 설정 중 하나입니다. <옆집친구>, <아스팔트 정원>, <연애혁명>같은 만화들에서도, 소꿉친구라는 키워드는 연애 이야기를 풀 때 쓰이는 소재죠. 이야기가 길었는데, 하여간 히로와 히까리의 그 선을 넘는 듯 안 넘는 듯한 에피소드들이 꿀렁꿀렁 나올 때마다 제 마음은 꾸잉꾸잉 했다는 얘기입니다.
6.
<H2>에는 이렇게 지금 읽어도 먹히는 키워드들이 있는 반면에, 아 이건 좀 그렇다 싶은 키워드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영복이 그렇죠. 분명히 야구 만화니까 수영복 나올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아다치 미츠루는 어떻게든 수영복(을 입은 여자)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괜히 주인공들 수영장으로 보내고 바다로 보냅니다. 심지어 야구 연습장에서도 수영복을 입게 합니다. 이것이 독자들을 위한 '서비스'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작가의 오너캐가 작중에서 대놓고 밝혔거든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서비스'라고 계속 말해줍니다. 이 양반 참 지독하네, 라는 생각이 들지만서도, 이 만화가 소년 타겟 만화 잡지에 연재되었다는 것, 20년도 전에 그것도 일본에서 연재되었다는 것, 그래 최소한 알몸은 그리지 않았다는 것 등등을 끊임없지 독자 합리화(?)하며 넘겨냅니다.
7.
수영복 말고도 딴지 걸고 싶은 키워드들이 많지만서도, 어쨌든 이 만화는 지금 읽어도 재미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저에게 <H2>와 <식객>이 다르게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각 시대와 문화와 나라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은 다를 수밖에 없죠. 당연합니다. 요는 내가 동의하는 시대정신에 얼마나 위배되는지, 몇 개의 시대정신을 위배하는지, 위배된 것들을 감수하더라도 가치가 있는지의 문제입니다.
8.
<식객>에는 저질스러운 성차별적 요소(한국에서 먹고 싶은 건 한국 여자!)와 골수적 민족주의적 관점(술잔은 돌려야 제맛이지!)과 요식업에 대한 이상한 비판(식당에서 조미료 쓰지 마세요!)이 나옵니다. 단 1권에서요. 제가 동의하는 시대정신의 정도에도 위배될 뿐더러 갯수에서도 이미 스카우터를 터뜨렸습니다. 그러고도 재미있느냐 한다면 저에겐 또 그것도 아니라는 게 사실 가장 큰 문제였죠.
9.
<H2>에는 (스토리 전개에 전혀 상관 없는) 비키니와 비키니와 비키니가 34권에 걸쳐 나옵니다. 분명히 저에게는 아쉽고 아쉬운 지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감수하고 34권의 끝까지를 읽어내게 하는 재미가 <H2>에는 있었습니다. 바로 이 차이가, <식객>은 자신있게 추천하지 않고, <H2>는 꾸물꾸물 망설이면서 '그래도 한 번 볼 만은 해'라고 추천인 듯 추천아닌 추천같은 이런 긴 글을 쓰게 한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음, 이 만화, 음, 그래도 한 번 볼 만은 합니다. (꾸물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