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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eunpa Sep 30. 2024

솥 이야기

왕실 권위의 상징

충북 괴산군에는 무게가 43톤에 달하는 초대형 가마솥이 있습니다. 이 가마솥은 지난 2003년 김문배 전 군수가 ‘군민 화합 도모’를 취지로 제안하여 2005년 모습을 드러냈죠. 군 예산 2억 7000만 원에 군민들의 성금 2억 3000만 원이 더해져 무려 5억 원의 제작비용이 들어간 국내 최대 가마솥이었습니다.


당시 괴산군은 약 4만 명분의 밥을 한꺼번에 지을 수 있다고 홍보하며 2006년까지 동짓날과 지역 축제 등에 이 솥을 활용했습니다. 하지만 솥의 내부 온도 차가 너무 커 정작 솥의 주요 기능인 밥 짓기에는 실패하고 말았죠. ‘세계 최대’를 내세워 추진했던 기네스북 등재도 실패하면서 결국 이 대형 솥은 애물단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지자체의 대표적인 예산 낭비 사례로 언급되는 불명예도 얻고 말았어요.


흔히 솥이라 하면 바닥이 둥그스름하고 발이 없는 가마솥을 떠올립니다. 이처럼 발이 없는 솥을 부釜라 하고, 전근대에 제기祭器의 용도로 쓰이던 발 달린 솥을 정鼎이라 합니다. ‘鼎’ 자의 생김새를 보면 발 달린 솥의 모양과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죠. 여러분도 그렇게 보이시나요?


그런데 말이죠. ‘군민 화합’의 도구로 선택된 것이 왜 솥이었을까요? 솥은 옛날부터 매우 중요한 가산家産 중 하나였어요. 단순한 조리도구 이상의 의미였다는 겁니다. 일반 백성들은 이사할 때 새집에 다른 것보다 솥(釜)부터 먼저 거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야 새 집에서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죠. 이 풍습이 지금껏 내려와 간혹 주위에 보면 이사할 때 전기밥솥부터 들여놓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제주 지역에서는 솥을 재물신으로 모셨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그렇다면 솥은 일반 백성에 한해서만 귀중한 의미를 가졌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솥(鼎)은 지배층에게 남다른 의미를 가졌죠. 그 의미의 기원을 찾으려면 중국 고대 왕조 하夏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중국사에서 가장 이상적인 태평성대의 상징이라 하면 바로 요순시대堯舜時代를 꼽습니다. 그 시대를 이어받은 이가 황하를 다스려 백성을 구제한 우禹였습니다.

하나라를 세운 우. 송나라 때 그린 그림입니다. (사진: 대만 국립고궁박물관)

하나라를 세운 우禹임금은 천하를 아홉 개의 주(九州)로 나눈 뒤, 각 주에서 진상품으로 올라온 진귀한 청동을 모아 9개의 솥, 구정九鼎을 만들라 명을 내렸죠. 그 후 구정을 소유하는 자가 곧 천자였다고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는 전합니다. 이 말인즉슨 솥은 제왕의 정통성과 왕권의 신성함을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경주 천마총 출토 청동정 (사진: 국립경주박물관)

현전하는 우리나라 역사서 중 ‘솥 정鼎’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입니다.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고구려 제3대 왕, 재위 18~44)은 재위 4년 겨울, 부여를 치러 가던 중 비류수 가에서 불을 피우지 않아도 스스로 열을 내는 신비한 솥을 발견하여, 그 솥에 밥을 지어 군대를 배불리 먹입니다.*1 솥의 등장 신이 예사롭지 않죠?

황해남도 안악군에 위치한 안악 3호분 벽화 일부. 왼편 부엌에 솥이 보입니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 고분벽화 3D 가상전시관)

위 기록을 통해 우리 민족도 기원 전후 솥을 이용해 밥을 지어먹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오랜 옛날부터 솥이 단순한 취사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솥이 왕권, 정통성의 상징으로 통한 것은 꽤 오랜 시간 이어졌습니다.


조선에 와서도 이와 관련한 기록이 보이거든요. 세조世祖(조선 제7대 왕, 재위 1455~1468)가 아직 수양대군首陽大君이던 시절, 그의 집에 있던 가마솥이 스스로 소리 내어 우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때 한 무당이 수양대군의 부인인 윤씨(훗날의 정희왕후貞熹王后)에게 “이는 대군이 39세에 왕위에 오를 징조”라는 말을 하고 사라졌다고 합니다.*2 솥이 ‘왕이 될 상’을 알아본 거죠.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지어낸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솥의 상징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입니다.


경복궁 근정전에 가보면 큰 솥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간혹 이게 쓰레기통인줄 알고 여기에 쓰레기를 버리는 분들도 계시는데, 절대 그러시면 안 됩니다. 단순히 근정전 주변을 장식하기 위해 놓은 것이 아닌, 왕권의 상징물로 놓은 것이거든요.

경복궁 근정전의 청동정靑銅鼎 (빨간 원 표시,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괴산군의 솥은 다른 곳으로 옮기자(자그마치 2억 원을 들여서!!), 아니다 전시행정의 상징물로 그냥 두어야 한다 등 말이 많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솥이 받는 대우가 이렇게나 달라졌네요. 부디 인기영합적 포퓰리즘 행정에 놀아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요.




*1) 『三國史記』 卷14, 高句麗本紀2, 大武神王 4年(21).

*2) 『世祖實錄』 卷1, 總序, 30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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