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를 위한 유급 휴가
대학교수에게는 일반적으로 6년 이상 정규직으로 근무했을 경우 1년의 연구년(안식년)을 보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연구년이란 교수들이 온전히 학문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강의나 학업지도의 부담을 면제해 주는 제도예요. 공무원도 5년 이상 재직했을 때 최대 1년간 자기 계발을 위한 무급 휴직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전근대에서 이와 비슷한 제도를 찾는다면 조선 시대의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떠올리게 됩니다.
‘사가독서賜暇讀書’는 한자 뜻 그대로 관리들에게 휴가(暇)를 주어(賜) 독서와 학문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일종의 유급휴직제도입니다. 세종世宗(조선 제4대 왕, 재위 1418~1450) 때 처음 시행하여 영조英祖(조선 제21대 왕, 재위 1724~1776) 때 폐지될 때까지 340여 년 동안 시행되었어요.
조선은 유교주의 국가로서 건국 이래 문文을 숭상하고 유교적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국가적 과업이었습니다.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하여 집현전 학자들을 우대한 것도 이러한 이념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죠. 세종은 집현전의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실무에 치인 나머지 학문연구와 성장에 악영향이 있을 것을 걱정하며 권채權綵·신석견辛石堅·남수문南秀文 등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집현관集賢官을 제수한 것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으므로 다만 글을 읽혀서 실제 효과가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각각 직무로 인하여 아침저녁으로 독서에 전심할 겨를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본전本殿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전심으로 글을 읽어 성과를 나타내어 내 뜻에 맞게 하고, 글 읽는 규범에 대해서는 변계량卞季良의 지도를 받도록 하라.”*1
처음에는 휴가자들이 집에서 글을 읽었으나(재가독서在家讀書) 김자金赭가 ‘집에 있으면 사물事物과 빈객賓客을 응접하지 않을 수 없어 산속의 고요한 절에서 읽는 것보다 못하다’고 아뢰자 세종은 1442년 신숙주申叔舟·박팽년朴彭年 등 6인에게 휴가를 줄 때는 북한산의 진관사津寬寺에서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를 상사독서上寺讀書라고 합니다.
세조世祖(조선 제7대 왕, 재위 1455~1468) 때 잠시 중단되었던 사가독서제는 성종成宗(조선 제9대 왕, 재위 1469~1494) 때 다시 부활했습니다. 성종은 증조부인 세종만큼 학문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독서제를 위한 별도 공간 ‘독서당讀書堂’을 본격 운영했으며, 중종中宗(조선 제11대 왕, 재위 1506~1544) 때 설치된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은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없어지기 전까지 75년 동안 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독서당의 존재는 집현전이나 규장각, 홍문관보다 덜 알려져 있지만 당대의 지위는 대단했습니다. 사가독서자들은 정월이나 동지와 같이 전 관원이 참석해야 하는 행사 외에는 불참해도 된다는 특전이 주어졌고, 왕은 수시로 선온宣醞(임금이 신하에게 술을 내려 주던 일, 또는 그 술)을 내려 위로했습니다. 대개 당하관堂下官(정3품 이하~종9품) 이하였던 사가독서 참여자들은 당상관堂上官(정3품 이상)의 대우를 받았다고 전합니다. *3
독서당을 경험한 이들의 면면도 매우 화려합니다. 신숙주·주세붕周世鵬·이황李滉·이이李珥·정철鄭澈·유성룡柳成龍 등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독서당을 거쳐 갔습니다. 이이의 저서 중 『동호문답東湖問答』은 이이가 동호독서당에서 사가독서하며 지은 것입니다.
현재 서울 성동구의 행당초등학교에서 한남동 76-6번지에 이르는 ‘독서당길’은 서울의 핫플레이스 중 한 곳이며, 독서당이 있었던 장소입니다. 옥수역 3번 출구 옥수극동아파트 정문에 가면 조선의 인재를 위한 전용 연구 공간이었던 독서당 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1) 『世宗實錄』 卷34, 世宗 8年(1426) 12月 11日.
*2) 계회도契會圖란 같은 소속의 문인들끼리 친목 도모와 풍류를 즐기기 위해 가졌던 모임을 그린 것이다.
*3) 서범종, 2003, 「조선시대 사가독서제의 교육적 성격」 『한국교육학연구』 9권 2호, 안암교육학회, 16~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