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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eunpa Nov 12. 2024

구휼救恤

백성을 구제하라


구휼救恤이란 전염병이나 흉년, 자연재해 등으로 재난 당한 이들을 사회적·국가적 차원에서 구제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코로나19 사태가 한창일 때 정부가 국민생활안정과 경제회복지원 목적으로 전 국민에게 지급한 긴급재난지원금도 현대판 구휼제도의 일종이라 할 수 있겠죠. 국가가 생긴 이래 공공부조사업은 군주의 중요한 자질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 역사상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구휼제도는 고구려의 진대법賑貸法입니다. 고구려 제9대 왕 고국천왕故國川王(재위 179~197)은 재위 16년이던 194년 겨울, 사냥을 나갔다가 사정이 어려워 어머니를 부양하지 못해 슬피 우는 이를 발견했습니다. 왕은 백성들이 힘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홀아비·과부·고아·홀로 사는 노인·병들고 가난하여 스스로 먹고살기 힘든 이들을 찾아 구제하도록 명을 내렸어요. 또한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매년 봄과 가을에 나라의 곡식을 가구 수에 따라 차등 지급하고, 겨울에 갚도록 하는 것을 법으로 정하였는데*1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구휼제도인 진대법입니다.

『삼국사기』 진대법 설치 기사 (사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진대법과 같은 고대의 구휼제도는 후대에 계승 발전되어 고려에서 보다 체계적으로 시행됐습니다. 태조太祖(왕건王建, 고려 제1대 왕, 재위 918~943)가 진대법과 유사하게 운영되는 빈민구제기관 흑창黑倉을 설치하였고, 성종成宗(고려 제6대 왕, 재위 981~997)은 할아버지가 설치한 흑창에 미(米) 1만 석을 더하여 의창義倉으로 개편했습니다.*2 


이외에도 이재민에게 세금과 노역 등을 면제해 주는 재면지제災免之制, 구휼 시행 시 홀아비·과부·고아·홀로 사는 이들을 우선 배려했던 환과고독구휼지제鰥寡孤獨救恤之制, 이재민에게 의식주 및 의약 등을 나눠 주었던 수한역려진대지제水旱疫癘賑貸之制 등 다양한 구휼제도가 국가 차원에서 시행되었고, 서민 의료 기관인 제위보濟危寶와 혜민국惠民局, 병자를 치료하고 기아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의복·식량 등을 지급하는 등 구호사업을 펼친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 등의 관서가 설치됐습니다.


고려시대부터 지금의 코로나19와 같이 나라에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대응했어요. 전염병이 돌 경우 환자의 치료 및 시신 처리 등을 담당한 구제도감救濟都監, 구휼 사업을 위한 임시기구인 구급도감救急都監 등이 그 예입니다. 두 기구의 명칭에서 보이는 ‘도감都監’이란 국가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 설립했던 임시기구를 뜻해요. 고려와 조선에서는 다양한 도감이 수시로 설치됐습니다.


조선시대에 구휼제도는 점차 고도화되었습니다. 조선의 구호기관으로는 제생원濟生院과 혜민서惠民署, 활인서活人署가 있습니다. 제생원은 조선 초 운영되었던 서민 의료 기관으로 고려의 서민 의료 기관이었던 제위보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였고, 세조 때 혜민서로 병합되었습니다. 

서울 종로구의 제생원 터 표석 (사진: 한국역사박물관)

혜민서는 의약과 백성의 치료 등을 담당했던 곳입니다. 태조太祖(조선 제1대 왕, 재위 1392~1398) 때 고려의 혜민국을 계승하여 혜민고국惠民庫局이 처음 설치되었고, 태종太宗(조선 제3대 왕, 재위 1400~1418) 때 혜민국으로 개칭하였다가 세조世祖(조선 제7대 왕, 재위 1455~1468) 때 혜민서로 바뀌어 고종高宗(조선 제26대 왕·대한제국 제1대 황제, 재위 1863~1907) 때 폐지될 때까지 운영됐습니다. 활인서 역시 고려의 동서대비원을 계승하여 병자와 갈 곳 없는 이들을 구활 했던 구제기관이에요.


고구려의 진대법, 고려의 흑창 등과 같이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추수 뒤 갚게 하는 방식의 진휼제도는 꾸준히 계승 발전되어 조선시대에 국가적 제도로서 확립되었는데 그것이 환곡還穀입니다. 환곡을 통해 곡식을 빌린 백성들은 일정 수준의 이자를 더해 갚아야 했었는데, 이것이 점차 악용되어 조선 후기에는 백성을 괴롭히는 제도가 되어버려 민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죠. 조선 후기 삼정의 문란*3 중 제일 부패가 극심했던 것이 환곡이었습니다. 

유계춘 묘. 조선 후기 탐관오리의 수탈을 견디지 못하고 진주 농민 봉기를 주도한 인물입니다. (사진: 디지털진주문화대전)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자로 평가받는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진휼의 계획과 범위를 정할 때 첫 번째로 시기를 잘 맞추고, 두 번째로 고른 분배를 위한 세부 계획을 잘 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백성을 구휼하는 데 있어 ‘적절한 때’와 ‘고른 분배’는 고금을 막론하고 현재에도 유효하죠. 우리가 역사를 왜 알아야 하는지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1) 『三國史記』 卷16, 高句麗本紀4, 故國川王 16年(194).

*2) 『高麗史』 卷 80, 志34, 食貨3, 常平義倉.

*3) 조선 후기 국가 재정의 근간을 이루었던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환곡)의 운영이 부패하여 혼란스러워진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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