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는 법을 잊어버린것 같아' 그 남자가 말했다.

by Choi


후줄근한 티 한 장에 사각팬티 차림으로 그 남자가 나만의 거룩하고 신성한 공간에 갑자기 출현했다.(신혼도 아닌데 이건 너무하잖아.)


한국에 오면 이것저것 할 것도 많고 하고 싶었던 것도 넘쳐나서 호치민에서 정작 이름만 마담이었던 난 진정한 마담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한국에는 모든 게 다 있으니깐. 그렇게 믿었던 철없는 나의 기대는 투명 유리 뒤편 현실과 만나기 시작했다. 시대에 못 따라간 나의 불찰일까? 투명 유리를 통해 본 현실과 뒤편 현실은 달랐다. 코로나로 한국은 자택 근무가 많아졌고, 호치민에서는 정말 너무 황달 할 만큼 바빠서 여름휴가도 7년째 못 가던 그 남자에게 수월해진 한국 업무는 어쩌면, 그 남자에게 충분히 앞만 보고 달렸으니 조금은 쉬어가도 된다고 다독여 주는 뭐 그런 선물 같은 것이 되었다. 어찌 되었건 그 남자가 나의 거실에 있다. 그 남자가 이젠 집에 있다. 구정 이후 계속되는 재택근무, 더 나아가 앞으로 매주 월요일은 재택근무로 규정 지어질 것 같다는 통보까지 친절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씩 웃었고 난 '하'라는 탄식이 나왔다.


나의 공간이 지독히도 중요한 나이다. 나의 영역이 눈물 날 만큼 간절한 나이다. 난 나의 루틴에 방해받는 것을 무척 싫어한 나머지 사람들과 만남 약속도 잘 하지 않는 고립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나마 책이 있어 다행이었다. 어딘가에 몰입을 하던 집중을 해서 그 힘을 빌려 꾸역꾸역 버티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남편과 아이에게는 집중하고 싶지 않았다. 내 삶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는 것이 책 읽고 글쓰기 그리고 영화보기였다. 그리고 운동!! 그럼 현실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생각과 상상 속에서 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현실 부적응자인 난 이 익숙해진 우울감을 내 몸에서 내 머릿속에서 내쫓아 내기 위해 '감사함' 바이러스를 머릿속에 우거지로 쑤쎠넣고, 현실에 만족하기 위한 의식과 절차를 매일 아침마다 한다. 난 음악을 틀고, 명상을 하고, 사경을 하고, 고개를 숙인 뒤 절을 한다. 나만의 사색과 생각을 끊어낼 의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를 위한 마법의 주문을 외운 뒤 나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그 공간 안에 그 테두리 안에 그 남자가 '커피 내려줄까?'라고 아침마다 묻고 있다. 배꼽 옆 쪽엔 좁쌀 구멍까지 나 있는 회색 빈폴 티셔츠( 신혼 때 커플로 산 티셔츠. 도대체 몇 년 된 거지??)와 이번에 새로 이마트에서 사다 준 체크무늬 사각팬티를 입고서 그 남자가 오늘도 아침에 나의 공간에서 나의 거실에서 '카페라테 마실 거지?'라며 아주 여유롭게 묻고 있다.


그 남자가 거실 소파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거대한 파장과 아우라를 내뿜고 있다. 그 옆에 고양이는 큰 대짜로 사람처럼 누워 눈깔을 희덕 보이며 고개를 뒤로 내 젖힌 모양새를 하고선 번갈아 나와 우리 신랑을 주시하고 있다. 건식사료를 다 먹었다고 간식을 달라고 옆에 와서 치대기도 한다. 고양이 똥도 치워야 하고 물그릇도 확인해야 하는 아침에... 그 남자도 자기 공간을 찾아 헤매고 있다.


그 남자는 아이 방에 둥지를 틀었다. 등교하고 없는 아이 방에서 아이 책상에 앉아서 또는 아이 침대에 누워서 일하고 있다. 그러다 내가 운동을 하러 가는 기척이라도 보이면 냅다 거실로 나와 환희 웃는 얼굴로 잘 다녀오라고 마중을 나온다. 그 남자는 티브이와 업무용 랩톱을 펴고 이젠 내가 '왕'이라는 신호를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몸소 보여준다. 그 남자도 자기 영역이 무척이나 필요해 보인다. 그 남자는 티브이를 무척 사랑한다. 과자와 달달한 단감을 즐겨 먹는 그 남자도 무척이나 기다렸던 시간. 내가 운동 가는 두 시간.


구정 이후 그 남자는 아이방으로 출근을 하고 거실로 퇴근을 한다. 매일 아침 난 나의 의식을 이행한다. 어색하다. 나의 모습을 그에게 들키는 것 같아서 매우 불쾌하고 불안하다. 하지만 난 하루를 살기 위해, 나를 위해, 오늘도 거실에서 나만의 의식을 실행했다.


그 남 자가 나를 보며 말한다.


'회사 출근하는 법을 까먹은 거 같아.'

'그러게. 한국이 많이 변했다. 그치?'


내일은 출근을 한다고 한다.

왠지 그 남자가 없는 거실이 '휑'할 것 같다.


난 이만 운동이나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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