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삼킨 마음

우당탕 급한 데로 한 해 마무리.

혹시 재혼 부부이신가요?

by Choi

캠핑을 가면 한 가지 나만의 의례 의식이 있다. 이른 꼭두새벽 어둑어둑한 시간 텐트밖에 나와서 축축한 이슬 맞은 의자를 먼저 편다. 버너에 물이 끓는 동안, 눈앞에 펼쳐진 산, 바다 또는 강을 넋노고 보는 것이다. 그 차갑고 투명한 공기를 훅 하고 들이킨다. 동시에 끓는 물에 달달한 맥심 커피(뭐 멋있는 아메리카노나 에스프레소가 아니라) 한봉을 넣고 금지된 행위 즉 기다란 빈 봉지로 휘휘 젛는다. 그리고 별로 개의치 않는다. 산발머리를 하고선 배시시 정신 나간 여자처럼 홀로 씩 웃는다. 해가 캄캄한 하늘을 아련히 비추며 느긋하게 올라온다. 그래.. 이거지. 오늘도 내일도 어김없이 태양은 뜨고 지구는 돌고 난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간다.


주머니 속에 이 순간의 느낌과 감성을 꼭 꼭 눌러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그런 나날을 선물 받은 한해 이기도 하다. 한국이란 나라가 이런 선물도 주는구나.


한 해가 마무리되었고 근처 가까운 절 타종식에 다녀왔다. 울컥 올라온다. 이 거 뭐지? 2022년 한 해 난 한 편의 드라마를 찍었다. 스펙터클한 한 해였다. 모든 것이 샷다운된 호치민을 야반도주하듯 간신히 빠져나왔고 텅 빈 집에서 일회용 버너와 베개 3개, 요 2개로 우리 식구는 2주 동안 격리기간을 버텼다. 2주 뒤 아이는 학교로, 남편은 직장으로, 그 둘은 갈 곳 있는 그들만의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아니 돌아가지 못할 뻔했다. 돌아가기 전 그 둘은 입을 옷이 반팔, 얇은 옷 크록스 한 켤레와, 운동화 한 켤레 이렇게만 있었다. 세탁기가 없어 손빨래로 옷을 감당하기에 무리였다. 물이 완전히 빠지지 못한 옷에서 쿰~쿰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쿠팡으로 소형 짤 탈수기를 구입했고 그것이 신의 한 수였다. 도톰한 옷과 점퍼가 필요했다. 몸이 아직 베트남 열대 지방에서 살다 온 그 몸뚱이였기에 으슬으슬 덜덜 떨렸다. 격리가 풀리는 오후 5시, 겨우 인터넷 터지는 나의 핸드폰 한대를 가지고 집 주변을 열심히 검색했다. 쇼핑몰이 가까운데 있었다. 아이옷 몇 가지와 남편옷 몇 가지를 마구 주워 담았고 아이 등교 준비는 2시간 만에 마무리되었다. 배가 고팠다. 지하 식당 푸드 코트에서 고등어구이 정식, 충무김밥 그리고 저녁에 떨거지로 3팩에 만원 하는 죽을 사서 먹고 2팩은 내일 아침을 위해 가져왔다. 한국에서 첫 외식이었다.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장은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야말로 텅 빈 집에서 난 집 공사를 시작했다. 임부 아저씨들 마다 '지금 이곳에서 사람이 생활을 하고 있나요?'라고 어김없이 다들 물어보았던 그 텅 빈 집에서 2달을 버텼다. 아 너무 추운 11월이었다. 공사하는 동안 가끔 차 뒷좌석에서 잠이 든 적도 있다. 오돌돌 떨었다. 화장실 공사를 할 때는 집에서 관리실 화장실까지 질주를 했고 며칠은 집 근처 호텔에서 생활했다. 무식이 용감했고 한국 정착비가 상상 초월이었기에 감히 셀프 인테리어를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지금 생각하면 '으~~ 악' 소리가 난다. 아 두 번 다신 하지 않으리라 맹세했고 다짐했다. 임부 아저씨들과 기싸움도 힘들었고 점심 식비 역시 만만치 않았다. 우리 가족에겐 한국 정착과정이 해외인민을 가서 그곳에서 정착하는 과정과 동일했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주는 지인도 가족도 부모도 없었다. 뭐 알아주기까지 바라지도 않았다. 아니 사실 바라는 마음이 어디 구석 한켠에 있었기에 서운한 마음도 함께 했었으리라. 그들은 한국 사람이 한국으로 이사 온 정도로 생각했다. 혹은 해외 이사라 하더라도 원래 가지고 있던 가전제품과 가구가 살림이 다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냥 웃으리.


컨테이너 짐은 사실 패킹도 하지 못한 채 한국으로 왔다. 호치민 격리와 샷다운이 풀릴 때까지 임부가 아파트 안으로 진입이 불가능했고 컨테이너 트럭조차도 허가가 나지 않았다. 기다려야 했고 10월 말이 되어서야 카카오 영상 통화로 짐을 샀다. 오~ 신기술의 힘을 빌러 화상통화로 이삿짐을 산 사람은 나 말고 함께 한국으로 발령 난 다른 주재원 가족들도 몇몇 있다. 한국으로 짐이 건너오는데 2달 넘게 걸린 듯하다. 어차피 가전제품과 가구가 하나도 없는 상태였고 이곳에서 다 구입했기에 딱히 불편한 점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불현듯 지금 바다 건너오고 있는 컨테이너 안에는 쓰레기만 있다는 뜻인가? 도대체 뭐가 있지? 무슨 물건이 베트남에서 지금 한국으로 오는 거지? 그래도 나와 함께 16년 이상을 동고동락한 물건들인데,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리 없이도 잘 산다는 말인가? 실감했다. 미니멀 라이프. 최소한의 도구와 가구 생활필수품만으로도 충분히 사람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때 짐이 도착하면 더욱더 짐을 줄여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삿짐이 한국에 도착하고 짐을 풀었다. 임부아저씨들이 점심 먹기 전 즉 12시 이전에 해외 포장이사를 다 푼 집이 첨이라 했다. 그래도 짜장면과 탕수육은 대접했고 맛나게 먹고들 가셨다. 베트남에서 (Full furnished) 퍼니 쉬 된 아파트로만 이사를 다녔기에 그만큼 짐이 없었다.


난 컨테이너 짐을 받기 전 집 인테리어 공사를 마치고 가전제품을 설치했다. 공사는 서둘러 시작을 했고 틈틈이 가전과 가구를 알아보러 다녔다. (신혼생활을 한국에서 1년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림과 가구가 없고, 대학 때 사용하던 자취용품, 플라스틱 가구를 16년 전 컨테이너로 싣고 해외 이사를 했다. 그래서 난 새로운 가전제품과 가구를 한평생, 나이 마흔 중반까지 가져본 적도 새로 구입해본 적도 없다...) 가전제품 메니져가 나와 남편을 아래위로 처다 보며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그리고 마침 신혼 혼수 패키지 상품 팸플릿도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었고 난 유심히 보고 있었다. 순간 ‘신혼때 혼수를 장만해보았다면 난 어땠을까?’ 생각에 잠겨보기도 했다.


"혹시 신혼부부 이신가요?" 나와 남편을 동공이 벌어진 눈으로, 그럴 수 있다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묻는다.

" 네?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런데 신혼부부들이 하는 만큼 가전을 다 구입해야 하는데 혹시 할인 혜택이 있을까요? "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사실 가전샵이 떠나갈 만큼 '하하하하' 크게 웃었다. 나의 대답을 듣고선 자신 있는 목소리로, " 아.. 그럼 혹시 재혼이신가요? 청첩장만 있으면 혼수 패키지 저렴하게 가능합니다. 잘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메니져는 자신 있게 말했다.

" 아. 니. 에. 요... "라고 나는 대답했다.


이리저리 설명을 하고 해외 이사 중이라 아무것도 없어서 장만하러 왔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신혼부부 혜택은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국 그 특유의 판매 수법, 카드를 만들면 뭐가 할인이 되고, 회원 가입을 하면 포인트가 적립이 되어 현금으로 사용할 수 있고, 또 어떤 무슨 카드로 결제일시불로 하면 몇 프로 할인이 되는 둥부터 다섯 가지 정도 혜택과 할인 방법 등을 알려 주었지만 도통 무슨 말인지 헷갈리고 그 많은 절차를 이해하는데 한 30분은 걸린 듯하다. ( 나처럼 오랜만에 한국온 친구들이 항상 겪는 어려움 중 하나가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말기를 잘 못 알아듣는 거다. 말도 빠르고, 신조어도 많고, 새로 생긴 규칙과 방법이 많아 진심으로 알아듣기 힘들다) 결국 메니져가 알아서 최고 할인 혜택과 사은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조건으로 결제를 했다.


한국에서 살면 선진국이라서, 교통, 법규, 안전, 치안 모든 것이 최고이기 때문에 삶의 환경이 달라 질거라 기대했다. 너무 큰 기대를 했었다. 대학원까지 잠깐 학교 근처, 직장 근처만 살아 보았던 서울. 학생으로, 한때는 잘 나가는 싱글로 살았던 서울. 그때 20여 년 전 서울살이와 현재 20년 이후 한 아이엄마로서, 주부로써, 연고지 없이 정착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나의 모습은 20여 년 전 호치민에서 정착하기 위해 몸부림치던 그 가냘픈 새댁의 모습과는 별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버거웠다. 외국인학교에 등록을 한 아이 학비도 버겁고 비싼 물가도 버겁고 모든 것이 서류화, 공문화, 규정화로 잘 모르는 나 같은 어리버리 아줌마에게 내미는 그깟 종이 한 장들은 나의 마음을 베었다. 느닷없이 세금 납세 연체료 공문을 받았다. 몇 년 전에 거래한 아파트 무슨 법규와 잠깐 겹친 것 같은데 난 해외에 있어 몰랐고 그동안 연체료를 붙이고 붙여 돈이 불고 불었다. 전화해서 따져도 보고 해외 있었고 그럼 이메일이라도 줘야 되는 거 아니냐라는 항의를 했지만 국제청에서 하는 말이 '아파트 경비 아저씨에게 우편물을 전달했다. 우리 의무는 다했다. 그리고 담당자가 중간에 바뀌어서 이일을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이따위 말만 했다. 책임 회피. 순간 '맞아.. 한국이 이런 나라였지..'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겨울공기만큼 차가움을 느낀 한국살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곧 적응하기 시작했고 더 이상 큐알 코드가 뭔지 백화점 경비 아저씨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 핸드폰에 수십 가지 앱을 깔고 매일매일 들여다보며 공부를 했고 아이 학교마저도 모든 체계가 핸드폰 앱이 없이는 돌아가지 않았다. 교통수단 역시 버스시간, 지하철 노선표 정말 잘되어 있다. 눈이 휘둥그레질만큼 서울시내 어디든 버스와 지하철 하나면 다 통하는 서울이었다. 서울을 태어나서 처음 와보는 아이와 한동안 서울 구경을 다녔다. 버스는 신의 한 수였다.


'진정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그때 그 세상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타종식이 끝이 났고 모든 순간이 지나갔지만 여전히 난 20여 년 전 한국에서 나의 모습과, 마흔 중반이 된 지금 나의 모습 그 어정쩡한 중간 어디쯤에서 방황 중이다. 난 멈추어 있었다. 신기할 만큼 멈춰있었다. 머릿속에 4차원적 공간이 그려지면서 4명의 '나'가 맴돌고 있었다. 40년 전 해외학창시 절나, 20년 전 한국에서 나, 30~40대 베트남에서 나, 40대 후반 다시 한국에서 나. '나'란 없는 것. 그때 그 장소 그 상황에 맞추어 시시 각각 변화하고 있는 '나'. 달라지고 있는 '나'. 변화하고 있는 '나'.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알 수 없는 그 '나'라는 것이 조금은 성장하고 성숙해가면서 배움을 가진다는 것이다. 나이듦. 느리지만 천천히 모든 변화한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또다시 알게 모르게 그곳으로 스며들어가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참 난 다행이다.



우당탕 좌충우돌 한해는 나의 취업으로 다시 이어 지고 있다. 과연 난 다시 일어 설수 있을까?

나의 이런 오뚜기 정신은 또 어디서 나오는 걸까?

하~!

웃겨!

나의 허무 맹랑함과 무식함은 가끔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간과 하고 있었네~


아~ 집사! 다 필요없어. 신라면 한박스면 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경단녀 과도한 시도로 완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