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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삼킨 마음

경단녀로 살아 남기.

경단녀가 이런거구나.

by Choi

경력도 단절되었고

무언가를 하기에 두려웠고

가물거리는 기억과 이전 같지 않은 몸 때문에 자신감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사실 바닥보단 끝도 보이지 않은 깊고 어두운 우물 속으로 곤두 박질을 치고 있는 느낌이랄까.


아침에 두 남자를 각자 갈 곳으로 보낸 뒤 집안일을 대충 하고 후다닥 노트북을 편다. 정말 두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이 짓을 올 2월부터 시작을 했다. 무슨 짓? 구인, 구직 사이트를 천만번씩 들락날락 거리는 짓거리를 틈만 나면 하고 있다. 사실 면접도 몇 군대 보았고 합격도 했지만, 그놈의 시간! 그놈의 방학! 그놈의 아들 때문에 다시 손과 발이 꽁꽁 묶여, 일을 시작도 전에 출근할 수 없다는 전화와 문자만 벌써 2번을 보냈다. 어차피 하지도 못할 것을.. 대체 왜 난 몇 시간씩 식탁에 앉아 이력서를 작성하고, 자기 소개서를 수만번씩 고쳐쓰는 그런 진이 빠지는 짖을 하고 있나? 도대체 뭐 하러 면접은 보러 다닌 걸까? 무엇 때문에? 시간이 남아 돌아서? 심심해서? 지금 난 내가 미쳤음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마음의 진정을 찾기 위해 구직 구인 사이트를 그만 들여다보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난 쉬지 않고 잡코리아, 인크루트, 교육청, 인디드, 알바몬을 마치 중독된 인간처럼 매일 아니 몇 초, 몇 분에 한 번씩 들락날락 거렸다. 구직에 올라온 직업들을 외울 만큼 똑똑해지고 있었다. 네*버 사옥에서 채용하는 아침 2시간 음료수, 간식 진열 알바가 마음에 들었다. 이력서에 학력을 약간 수정한뒤 서류를 넣어 볼까 했지만 옆에서 보고 있던 울집 남자가 기어코 뜯어말렸다. 아무리 엘리베이터와 카터가 있다고 하더라도 무거운 것 나르다 이 나이에 병원비가 더 나온다며 날 진정 시켰다. 요구르트 배달 아줌마도 유심히 보았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난 정말 이 세상에 자기 일이 있고 , 자기 삶이 있고, 무언가를 하고 있는 아줌마들이 굉장히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부러웠다.


그랬다. 한국!! 나의 홈그라운드에 온듯한 착각에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나의 경력과 이력, 학력은 충분했지만 나이가 제한적이었고 한동안 일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경력단절'이 엄청난 결점이었다. 나이제한에 걸렸고, 여유롭지 못한 시간이 장애가 되었고, 경력단절이 걸림돌이 되었다. 마트, 다이소, 자연드림, 오아시스, 슈퍼 등 에서일하는 아줌마들이 부러워 마트에 갈 때마다 그녀들을 유심히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자유롭지 못했다. 주말을 반납해야 하는 근무가 대부분이었다. 오전, 오후 근무조 시간도 따로 있었다. 나에겐 불가능한 조건이다. 오전 커피숍 알바도 알아보았다. 시급이 작은 데다 한 달에 받는 돈이 30만 원도 채 되지 않았다. 진짜... 경력단절이 이런 거구나를 뼈에 사무칠 만큼 느꼈다.


그리고 난 더욱더 작아진 나의 모습을 보았다. 한국에서 경력단절과 나이는 생계와 직결이 되기도 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럼 이혼도 마음데로 못하는 건가? 도대체 먹고사는 일이 뭐길래... 나의 경우 생계는 아니지만 한국살이가 빠듯한 건 사실이고 외국인학교에 재학 중인 학비 역시 만만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떠나 난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그럼 나의 병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집안일과, 아이 돌봄, 마트장보기, 음식 하기 역시 가족을 위해 하는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이 가사들은 하면 할수록 난 아팠다. 많이 아팠다. 호치민이 아닌데 더이상 집에서 집안일만 하기 싫었다. 아이학교 픽업 드롭도 더이상 필요 없다. 버스가 있다. 아이도 이제 컸다. 잠깐이지만 가정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몇시간 정도는 나갔다 다시 돌아 오고 싶었다. 건강이 허락된다면 되는 날까지 일을 하고 싶다.


이미 엎질러진 물, 가정을 이루었고, 자식을 품었고, 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니 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난 일을 찾고 싶었다. 멈추지 않았고, 낙담하지 않았고, 꾸준히 계속해서 취업사이트를 돌아다녔다. 아줌마 정신으로, 급할 것 없다, 할 수 있다는 마인드와 모든 긍정의 에너지를 끌어다 노트북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고내와 인내의 시간이었다. 자기전에도 습관처럼 아이폰으로 구인 구직 사이트에 한번씩 들어가 보았고 어떤날은 보다 잠이 들었다. 옆에서 남편이 그정도 열정으로 공부를 했으면 서울대를 갔을텐데라고 놀리기도 했다. 그정도로 간절했고 절실했다. 그리고 해냈다!!!


정확히 8개월 만에 겨우 하나를 찾았고 다시 또 다른 하나를 찾았다. 심봤다. 고등학교 급구란에 이력서를 등록했고 고2, 고3 영어과 선생님이 잠깐 비는 시간에 일을 시작했다. 조금 먼 거리지만 어떠하리. 아줌마가 아닌가. 달려갔고 교감 선생님, 교장선생님, 교무부장님을 만나고 면접 통과! 한 달 정도 근무를 했다. 그리고 오는 1월부터는 다른 곳에서 다시 2달간 일을 한다. 이곳은 또 영어 유치원이다.


아~~~~~!! 나의 괴성이 들리는가.

많은 돈도 아니고 내가 비록 좋아하는 일은 아니지만 다시 학교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짧은 한 달 근무지만 생활에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우울함, 좌절, 슬픔 이딴 거 찾을 겨를이 없다. 바쁘다. 좋다. 나도 아침에 출근할곳이 있다. 빨래가 밀려 있고 설거지가 조금 쌓여 있다. 아이도 일주일에 한 번 혼자 1시간 정도만 집에 머물면 된다. 그 정도는 이제 할 수 있는 나이다.


나. 행. 복. 하. 다.

브런치에 합견된 이후 느끼는 행복감이다. 무언가를 해낸 뒤 오는 쾌감. 그러고 보면 난 참 목표 지향적인 인간인듯하다.

10년 만에 다시 올라선 교단...

그토록 학교가 싫고 가르치는 게 죽도록 싫었던 그곳에서

난 행복하다를 외치고 있다.


분명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아니 미쳤음이 분명하다. 운전을 하다가도 눈물이 났다.

왜?

좋아서...

내가 무언가를 아직 할 수 있다는 게 이토록 마음에 꽉 차는 느낌인지 몰랐다. 20대 30대가 나의 전성기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고 그 시절, 그 순간을 유지하지 못해 결국 지금 내가 이모양이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라는 '감사하는 마음', 이 일이라도 할수 있어서 '대박이다'라는 '경건한 마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만 다행이야'라는 마음. 그렇게 난 이 일을 받아들였다.


동시에 한 가지 명확하고 확실한 것을 알게 되었다.

난 집안일을 하면 아프다. 팩트다.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돌아버릴 만큼 죽고 싶을 만큼 아프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20년 동안 더 많이 아팠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밖에서 일을 하면 아프다가도 아프지 않다.

황당한 나의 결론이지만,

몸소 몸으로 입증이 되었고 정신적으로 다시 건강을 찾아 더 이상 남편을 괴롭히지 않는다.


메뚜기처럼 이곳저곳 다니며, 보잘것없는 땜빵 시간 강사지만, 나에겐 너무나 소중하고 값어치 있는 일이기에 오늘도 감사하고 내일도 감사하고 모레도 감사하다.


힘이 닿는데 까지, 메뚜기 강사일이 주어진다면 언제나 웰컴입니다!


집사! 나처럼 이랗게 구겨넣어. 그럼 되!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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