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oi Aug 24. 2023

연인처럼 다가온 집안일.

그 하찮은 일이 나를 일으켜 세운다.

어지러울 만큼 세상은 분주히 돌아간다. 바쁘다 바빠. 먹고살기도 바쁘고, 엄마노릇, 아빠노릇, 며느리 노릇, 딸 노릇, 아들노릇 등등 여러 가지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하느라 분주하다. 거기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 이상형의 모습에 스스로가 부합하지 못하면 자신을 평가하고 채찍질도 한다. 나름 무덤덤하게 이 모든 걸 다 해내는 사람도 있지만 유달리 심리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런 사람들은 덤으로 죄책감 한 덩어리도 마음속으로 살포시 들여온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말이다.


난 여러 역할을 하다 종종 어디론가 '나 자신이 사라 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한국 와서 그게 더 심해졌다. 가끔은 자식 된 도리를 너무 바라는 노 부모를 보며,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부모를 보면서 떠올린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스스로 그 무게에 짓눌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목구멍이 쪼여왔다. 특히 불효자라는 타이틀을 스스로 새기며 숨을 쉴 때마다 무언가 걸려 있는 듯한, 마치 호흡이 과부하되는 그런 느낌. 차라리 나이 드신 분들이라서, 옛날 분들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넘겨버리면 될 것을, 그땐 그렇게 가볍게 그들을 인정하지 못했다. 결국 병적으로 완벽을 추구하는 성향 그리고 너무 투철한 책임감이 가져온 최악의 '나 잘났다'는 생각안에 갇혀버린 것이다. '난 이런 사람이어야 해'라는 내가 만든 세상에 나의 모습에 철저히 갇혀 밖을 내다볼 여유조차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병이다. 자존감도 자존심도 난 '병'이라 생각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이 신념은 날 참 포근하게 감싸 안아 줬다. 나의 모든 실수와 실패를 무모화 시켜줬다. 괜찮다고 그냥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나 하나쯤은 이렇게 하고픈 데로 살아도 된다는 따뜻한 시그널을 보내줬다. 한 생각을 바꿨을 뿐인데 삶이 편해지고 있다.


본격적인 아이 방학이 시작되었고 아이와 함께 늘어지도록 늦잠을 잤다. 키가 커야 한다는 핑계로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아이 스케줄에 맞춰 하루 세 번의 밥과 간식까지 꼬박꼬박 챙겨 먹였다.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야만 하는 일도 이젠 없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기 전에 꼭 책을 다 읽어야 한다던지, 뱃살이 점점 나오니 오늘 운동을 꼭 가야 한다던지, 장 보러 꼭 대형 할인 마트에 다녀와야 한다던지, 하는 이런 사소한 강박에서 홀가분해졌다. 왜냐면,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믿음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도서관에 읽다 만 책을 그냥 반납했고 (아이 식사 준비와 함께 2달을 지내다 보니 내 시간은 전혀 없었다.), 운동은 점심시간 날 때만 틈틈이 다녀왔고, 마트를 포기하고 좀 비싸지만 집 앞 슈퍼에서 그때그때 해결한 적도 많다. 온라인 장보기도 자주 이용 중이다. 그냥  너무 따지지도 않고 비교하지도 않는다. 우선 아이에게 스트레스를 풀지 않기 위해 나를 아꼈다. 심지어 요즘은 최대한 돈을 쓰지 않을 방법을 많이 생각 중이다. 그냥 정신없이 물건 구입을 부추기는 SNS와 온라인 쇼핑에 괜히 반항하고픈 마음도 어설프게 생긴 것 같다.


그렇게 늦잠도 자며, 맛난 누룽지 튀김도 해 먹으며 방학을 보낸던 어느 날, 혼자 자전거를 타고 나간 아이가 자기 용돈으로 자두 한소쿠리를 사왔다. 난 아이가 너무 신기했다. 궁금도 했다. 무슨 생각으로 저 자두를 사 왔을까? 심지어 아줌마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자기가 직접 골랐다고 한다. 과일가게 아저씨가 몇 개 서비스로 더 줬다며 행복이 아이 얼굴에 한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런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이게는 큰 사건이기도 하고, 모험이기도 했다. 아직 한국 길이 생소한 아이는 똑같이 생긴 아파트와 도로 때문에 길을 잘못 들어 약간 무섭기도 했다며 끝없는 '자두' 이야기를 해댔다.

'엄마, 맛있지?, '엄마, 나 잘 골랐지?' , ' 엄마, 내가 큰 거 고르고 빨간 거 고른 거야.', '엄마, 달콤해?' 등등. 쉴세 없이 상기되고 긴장된 얼굴로 나의 반응을 기다린다. 그런 아이를 보며 한편으론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도 동시에 올라왔다. 마음씨가 참으로 따뜻한 아이. 사실 불안한 마음으로 아이를 키웠으니, 아이 역시 남들보다 걱정과 겁이 많다. 그런 아이가 한동안 아파트 주변길을 알고 싶다고 모험을 하듯 자전거를 타고 나가더니 구석구석 돌아다니다 작년 이맘때 먹었던 달달하고 새콤한 자두 기억을 떠올려 사 온 듯하다.


둘이서 발갛게 익은 자두를 경쟁하듯 배불리 먹고 각자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아이가 사 온 자두를 보면서 수만, 수천 가지 생각과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난 아이에게 함박웃음과 진실로 감동 먹은 얼굴표정 하나로 마무리 지었다.


무언가를 크게 성공한듯한 표정을 가진 아이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난 할 일이 없었다. 집안일을 할까 하다 좁디좁은 거실 한 귀퉁이에 떡 하니 차지하고 있는 크고 하얀 거대한 책장이 보였다. 이사 온 뒤로 책정리를 아직 다 하지 못했다. 호치민에서 그대로 가져온 책장이라 지금 이 집과는 동떨어진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만 나름 잘 어울린다. 책장을 가득 채우다 못해 가로 세로 엉망으로 눕혀 있는 책들을 보니 총채 난국이었다. 신기한 것이 그게 이제야 내 눈에 보인 것이다. 이전에 난 집정리, 집안일을 쓰잘데기 없는 일이라 여겼고, 인생과 시간을 허비하는 행위라 생각했다. 어쩌다 그런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는 모른다. 그 생각은 어디서 왔을까? 그래서 집 꾸미기, 이쁜 그릇 사는 친구들을 보면 색다르고 흥미롭게 보였다. 그들과 공감대가 전혀 없었고 홀로 동떨어져 있었다.


나의 사고가 그러했으니, 그 쓸데없는 집안일을 10년 이상 하고 살았던 나 역시 쓰잘데기 없는 인간으로 만든 것도 나였고, 그 속에 갇혀 우울감을 분수처럼 뽑아낸 것도 결국 나였다. 생각이 그 사람이라는 말이 더욱 실감 나지 않는가? 좀 더 가치 있고 좀 더 나 자신의 개발을 위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을 찾아 헤매었지만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 나 자신 스스로가 보기 괜찮고 사회가 정한 엘리트라는 단어에 맞추어 나를 만들기 위한 나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그릇된 생각 하나가 인생을 송두리째 뒤 흔들었던 것이다. 도대체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무슨 개발? 이전의 나를 떠올리면 두 볼이 벌겋게 달아 올라 민망하고 부끄러워 고개가 아래로 툭 떨어진다. 마음도 함께 툭 떨어진다. 내가 뭐라고... 아.. 창피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책장에 책들을 비우고 정리하는 순간순간이 즐겁다. 이 쓸데없는 일들이 한순간에 설레고 행복한 일로 탈바꿈되고 있다.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개운하다 못해 온몸이 씻겨 나가는 기분이 든다. 모든 묶은 때가 확 벗겨져 홀가분한 느낌.  버리고 치운다는 것이 나의 삶에 신선하게 다가온다. 다음날 아침에 정리 계획을 세웠다. 마음이 두근거렸다. 순서대로 차근차근 부엌, 화장대, 창고, 옷장, 서랍장. 그렇게 한 달 남짓 동안 집안을 비우기 시작했다. 이참에 미니멀은 아니지만, 정말 딱 필요한 것만 남기고 집을 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일은 더 이상 사소하고 귀찮은 쓸데없는 일이 아니었다. 이곳은 나의 가족이란 공동체가 사는 사회였다. 아 뿔사.. 난 그걸 놓치고 있었다.


노래를 들으며 장갑을 끼고 책 한 권 한 권 거둬내기 시작했다. 유물 같은 책도 발견했다. 베트남에서 책을 많이 정리하고 왔지만, 여전히 줄지 않은 책을 보며 난 도대체 뭘 하면서 살았나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런 즐거움과 행복을 난 왜 진작에 알지 못했을까? 나 하나쯤은 그냥 이렇게 살아도 되는데 말이다. 내 방식대로 내 삶을 이렇게 살면 되는 것이었는데. 이런 만족감과 뿌듯함이 이렇게 곁에 있었는데. 난 왜 아무것도 볼 수 없었을까... 왜 그토록 어둡기만 했을까...


비워진 책장은 코코가 들어가 쉬기도 하고 낮잠을 자기도 한다. 빈 공간이 나의 여백을 채우는 신기간 경험을 하고 있다. 곤도 마리에 책부터 정리정돈 온라인 유*브도 보면서 공부도 한다.


그랬다... 난 살림을 배워 본 적이 없었다...

관심도 없었고, 이런 걸 배운다는 게 나에게는 무척 생소했다.

설거지도 그냥 하면 되는 거고, 청소는 청소기가 하는 거고, 빨래는 세탁기가 하는 거지 뭐. 그리고 베트남에서는 메이드까지 있어서 어쩜 나에겐 기회조차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베이킹소다와 과탄산소다 그리고 식초의 힘에 화들짝 놀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얗게 변한 빨래와 양말, 물때가 지워지는 싱크대. 대박이다. 신세계가 이곳이구나.


내일은 화장대 정리 하는 날.


난 아무것도 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일을 하고 있다. 누워서 맘껏 뒹구는 시간도, 낮잠 자는 시간도 가지면서, 시간이 나면 내 방식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만족감을 얻으며 하루를 하루를 보낸다.


오늘도 난 음악과 새로 장만한 연 핑크 고무장갑과 함께~~


집사, 자는 데 사진 좀 작작 찍어.

코코가 화났다. 헛.











 

매거진의 이전글 미숙한데 아름다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