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그녀의 철학
정리를 하고 청소를 하고 단지 버렸을 뿐인데 어째서 식습관까지 바뀌게 되었을까?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 거지? 생각을 더 몰아붙인다. 더 멀리 갈 수 있는 곳까지 나를 관찰 하고 들여다보기를 한다. 건조기안 먼지통에 먼지를 거둬내며 다시 사색에 잠긴다. 베란다 밖으로 시퍼런 초록 감이 보인다. 먹음직스러운 오렌지색 감이면 더 이쁘겠지만 아직은 초록이다. 내가 좋아하는 초록. 한차례 비가 오고 나더니 다시 강열해진 햇빛아래 초록 나무는 어찌 이리도 아름다운 거지? 베란다 한편에 말려 놓은 나무 도마가 정겹게 느껴진다.
비워진 집은 나의 만족감으로 풍성하게 채워지고 있다. 감성도 느낌도 기분도 안정적이다. 너무 좋지도, 너무 다운이 되지도 않는다. 그 안정감은 그렇게 아주 조금씩 나의 곁으로 다가온다. 아이와 남편에게 짜증과 신세한탄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어느 날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게 인생이란 것을 알게 된 후,
어느 날 나도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어느 날 나도 늙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쿵 하고 가슴속 어떤 무언가가 툭 떨어진 그 후,
그래서 지금, 오늘이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정말 알게 된 후,
나의 사고는 차차 달라지고, 변화하고 있다.
곰곰이 생각을 다시 골똘히 해 보았다. 집안정리와 버림이 데려온 자유는, 어쩌면 나 스스로가 물건을, 사물을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는 그 통쾌함에서 오는 게 아닌가. 결국 나만의 통제력을 이 집안 물건들을 통해 내 맘대로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힘. 스스로 자유롭게 이리저리 옮기고 버리면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즉 내가 통제할 수 있고 관리할 수 있는 물건들로부터 얻는 만족감. 그 만족감으로부터 내가 안정감을 갖는 게 안닌가. 또 그것을 난 자유라고 느끼는 그런 비슷한 것을 느낀 게 아닌가 라는 생각. 이러나저러나 뭐 깨끗하고 깔끔해진 집은 참 좋다. 공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숨이 탁 트이는 게 요즘 집에 머무는 맛이 난다.
주방을 비우면서 냉장고와 냉동고도 함께 비웠다. 냉장고 파먹기? 열심히 비웠다. 그리고 동시에 베트남에서 장 보던 습관을 한국에서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을 냉장고에서 보았다. 이쯤이면 제정신이 아닐 수도 있겠다. 냉장고와 냉동고를 보면서 나를 보았다니 말이다.
우선 있을 때 쟁기고, 구하기 힘든 상품이나 물건을 찾거나 발견한 뒤 대량 구입 하는 습관. 한번 차를 끌고 나가면 장보기 힘드니 무조건 많이 사고 보는 습관. 한국에 살면서도 한국 음식, 해산물, 고기, 야채 등을 마구 사다 날랐다. 대형마트에 한번 가면 기본 40에서 50만 원정도 나왔다. 베트남에서 주로 6백만 동(30만 원)에서 7백만 동(40만 원)을 썼으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특히 고기와 과일을 구입한 날은 당연한 금액이었다.
이것이 큰 실수였다. 세상에 난 베트남 사람이 아닌데, 왜 물가를 자꾸 베트남동 으로 비교를 했을까? 함께 동행한 남편도 한국과일, 고기, 야채, 냉동식품을 보고서는 눈이 돌아가 벼려서 그게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어느 멍청한 부부 이야기가 곧 우리 이야기였다. 왜 한국에 와서 베트남 한국 수입물가와 비교를 하지? 왜 한국에 와서 베트남 과일과 고기 값을 비교하지?
와이프가 멍청하면 남편이라도 좀 똑똑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거는 뭐 어리벙벙 두 부부가 이모양이니 초반에 한국 정착 시 금전적으로 조금 힘들 수밖에 없었지. 우선 서서히 음식을 이리저리 해 먹으면서 비웠다. 고기는 캠핑을 다니면서 많이 해치운 듯하다. 얼마나 다행인지, 홈쇼핑 구매는 하지 않았다. 티브이를 잘 보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마*에서 1+1 행사할 때 세제를 좀 구입했는데 그것 말고는 창고도 거의 다 비워진 상태다.
한국 와서 제일 반가운 식품이 계란과 우유였는데 믿고 먹었던 오아시*계란이 영 시원찮았다. 동불 복지, 유정란 등등 먹어 보았지만 가격도 비싸더라. 이럴 땐 미우나 고우나 엄마한테 물어보았다. 송여사왈 한살*이라는 곳이 있다면서 동네에 한번 찾아보라고 한다. 어차피 엄마가 회원이니 전화 번호만 입력하면 된다고 한다. 역시 있었다. 우선 궁금했다. 그곳은 도대체 뭐 하는 곳인지.
집이 차차 정리가 되고 물건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동안, 난 바른 먹거리를 찾아 나섰다. 과자를 줄이고, 라면과 인스턴트 음식을 줄였다. 튀긴 음식도 줄였다. 왜냐면... 난 호르몬제를 주기적으로 복용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몸 상태가 꽤 예민하다. 아프기도 하고, 붓기도 하고, 속이 뒤집어지기도 한다. 특히 한 달에 한번 하는 생리가 시작할 즈음 몸이 아프다. 이번엔 편두통이 고통스러울 만큼 심하게 왔다. 불면증도 함께 왔다. 아직 수면유도제를 먹지는 않았지만 종종 먹고 잠좀 푹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속까지 매슥거려 병원을 찾아 편두통 약을 3달 연달아 먹은 듯하다. 속이 입덧할 때처럼 울렁거리니 죽 밖에 먹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고 찾다 '단호박'을 찾았다.
송여사가 알려준 '한살*'을 가보았고 인터넷에 검색도 해보았다. 매장이 크지는 않았지만 나름 유기농, 우리 먹거리, 우리 농작물임을 알 수 있었다. 우유, 두부, 두유, 야채물, 포도즙, 순수요플레, 깻잎 그리고 단호박을 사서 먹어보았다. 깜짝 놀랬다. 정말 놀랬다.
그래! 이거야.
죽과 단호박을 먹고 의도치 않은 다이어트를 하게 되었고, 입덧은 아니지만 비슷한 증상으로 새콤 달콤 샐러드를 찾다 보니 지금 주식이 샐러드로 바뀌어 버렸다. 신선한 과일과, 야채, 우리 농작물. 베트남에서 농약을 미친 듯이 뿌린 야채와 농작물을 먹을 때 베이킹 소다, 식초, 과일 세척제를 대량 투입하고 항상 의심하면서 먹었던 음식들을 이곳에서 정말 믿고 먹을 수 있다는 현실이 놀라웠다. 대형마트에 파는 유기농 먹거리와 별반 차이는 없었지만 그냥 웬지 더 믿음이 갔다.
한국에 이런 곳이 있구나. 굳이 우리집 냉장고를 채울 필요도 없고, 필요하면 그때그때 와서 구입을 하면 되고 그럼 매번 음식도 신선하게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량이지만 우리 세 식구 먹을 정도로 충분했고 일주일에 한 번 장 보는데 5만 원 정도면 과일까지 구매할 수 있었다.
'와! 진짜 좋다. 한국 좋다.
진짜 한국 오길 잘했네' 라고 난 다시 홀로 되새긴다.
요즘 한살*과 오아시*에서 번갈아 섞어가며 장을 본다. 마트보다 생활비가 더 절약된다. 필요하면 인터넷 배송도 시키고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잠깐잠깐 들러 필요한 물품을 구입해 온다. 물건이 떨어지거나 없으면 더 이상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없으면 다른 거 해 먹고, 잠깐 동네 마트 가면 다시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베트남이 아니다.
20년 동안 베트남에서 지녀왔던 생활 습관들을 허물 벗듯이 한 겹 한 겹 벗겨내며 사는 요즘이다.
공간이 많아진 냉장고는 한눈에 무엇이 있는지 훤히 들여다 보인다. 주로 야채와 과일이 많아진 우리 집 냉장고.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하다. 식습관이 우연히 바뀌긴 했지만 아이도 함께 잘 따라와 준다. 아이도 나도 면역력이 좀 더 생긴 것 같다. 과자가 항상 있던 곳엔 시리얼이 들어가 있고 무언가 더 먹고 싶고 속이 허전하면 어차피 키도 커야 하니 우유와 시리얼 혹은 냉동 베리와 섞은 요플레를 먹인다.
냉장고와 냉동고를 통해 나를 보았고 다행히 난 수습가능해진 인간으로 다시 돌아온듯하여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