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oi Oct 19. 2023

세월을 못 비껴간 남창도사.

그도 인간이었다.

애절이: 엄마

병철이: 아빠


베트남에서 일 년에 한 번씩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친정집에 머물렀다. 애절이는 멀고도 가까운 동남아 태국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는 병철이와 함께 머물렀다. 애절이는 병철이와 항상 치열하게 싸우고 이혼을 수천번 결심하지만 결코 그의 옆을 떠나지 않았고, 병철이도 그랬다. 나는 늙어가는 애절이와 병철이의 노후를 보면서 아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그 둘은 서로를 길들이며 공생하는 관계 같다.


내가 한국에 나가 있는 동안 애절이는 '엄마' 또는 '할머니' 노릇, 즉 책임을 꼭 완수해야 한다는 의지로 한국에 종종 나왔었다. 2016년, 정확히 아이가 6살 정도 되는 해 여름 애절이는 한국에 나오지 못했다. '하하'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여름 방학이었다. 아이와 둘이 하루 12시간을 쪼개어 2주정도 방황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떤 날은 호치민 시내를 뱅글뱅글 돌기도 했다. 아이 친구엄마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있지만, 나의 마음 에너지는 항상 바닥이었기 때문에 쉽게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아이에게 종일 웃는 엄마 얼굴, 활발한 엄마 얼굴, 짜증 내지 않는 엄마 얼굴을 보여주고 싶어서 나는 나의 모든 에너지를 끌어다 사용했다. 그 바람에 아이 친구 엄마들에게 내어줄 마음의 공간이 1%도 없었다. 그들과 관계유지는 도저히 불가능했었다. 오히려 엄마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들어온 날이면, 아이에게 짜증을 많이 내고 티브이 앞에 홀로 앉아 있는 나의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나의 특기 '거리두기'를 실천했다. 소위 '자진왕따'를 자발적으로 선택했다. 그래야 겨우 아이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니 방학이 더욱 힘든 때가 많았다. 급하게 마음먹고 그 자리에서 난 '단 2주라도 한국에 다녀오자'라는 결심으로 비행기표를 끊어 버렸다.


주재원의 장점 중 하나가 한국 가는 가족 비행기표가 가끔 나온다는 것이다. 태국에 있는 애절이에게 연락을 했다. " 괜찮아, 나 혼자 잘할 수 있어. 병철이 밥 열심히 챙겨주고, 골프도 잼나게 치고, 병철이한테 집중해. 나도 이제 다 할 수 있으니 날 믿어~."라고 애절이가 한국에 나오지 못하도록 온갖 술수를 부리며 잠깐만 있다가 올 거라 뻥을 쳤다. 그리고 난 3주 동안 머물렀다.



애절이가 없는 친정집은 나와 아이가 맘껏 자유롭게 늦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 되었고, 온갖 게으른 만행으로 무궁무진한 자유를 맛볼 수 있었다. 방에 큰 침대를 뒤로하고 넓은 거실 한복판에 이불을 깔았다. 저녁시간마다 우리 둘은 뒹굴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느지막이 일어나 시내 문화센터에 가서 번개맨도 보고, 영화관에 가서 자동차 나오는 만화영화도 관람하고, 백화점 꼭대기층에 위치한 꼬마 놀이동산에도 다녀왔다. 주말에는 집 앞 공원에서 무상으로 운영하는 분수 놀이터에 가서 놀았다. 놀다 배고프면 돗자리를 펴고 준비해 온 김밥과 치킨을 먹었다. 그리고 한국 대형서점은 빼놓을 수 없는 우리 둘의 놀이터였다. 한국의 문화시설에 감탄하며 24시간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날도 발바닥이 아플 정도로 많이 걸었다. 오락실에서 노란 가필드 인형하나를 뽑아 기분도 아주 좋은 날이었다. 아파트 앞 부동산을 지나가다 문득 그해 신수를 보지 못한 사실이 떠올랐다. 나와 남편은 사주나 신수를 보는 데 있어 큰 거부 감은 없었다. 우리 둘은 서로를 의지하기도 했지만, 사주에 의지하기도 했다. 한국으로 돌아올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항상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고, 그 순간을 대비해 살 집을 장만하고 싶었다. 애절이는 절실한 불교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사주와 신수를 보러 다녔다. 종종 우리 부부사주도 봐주는 수고도 해주었다. 그곳은 남창이라는 지역에 있었다.


애절이 한테 전화를 걸어 '그 남창에, 나 혼자 가도 돼?, 멀어?, 거기 연락처 좀 알려 줄 수 있어?라고 물었다. 애절이는 매우 적극적으로 알려주었다. 버스 번호, 버스 타는 곳, 갈아타는 곳, 어느 지점까지 가서 버스를 타야 한다는 등의 여러 정보를 알려주며 비싼 택시를 굳이 탈 필요 없다고 했다.


다음날 나는 콜택시를 불렀다.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난 항상 애절이가 원하는 반대로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더욱더 택시를 타고 가야겠다고 결심 했다. 택시비 18000원을 지불했다. 남창 도사는 휘파람을 '휙, 휙~ '길게 몇 번 불더니 '들어오세요'라고 크게 소리 질렀다. 난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방 안으로 들어갔고 아이는 부엌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와 마당 잔디밭에서 놀았다. 처음엔 아이를 '이런 곳에 데려 와도 되나'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애절이가 그곳은 절 같은 곳이라 괜찮을 거라 했다. 가보니 암자 같은 곳이었다. 아마도 아이는 조그만 사찰로 기억할 것이다.


도사는 눈을 감았다 떴다. 긴 수염에 긴 머리였다. 어딘가 모르게 도사스러운 외모였다. 뭐든지 나와 우리 남편에 대해 척척 알아맞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주를 잘 풀어서 도사라는 별명이 지어졌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나의 최대 관심은 '집 장만'이었다. 한 명당 사주를 풀어 주는데 3만 원 정도였다. 5만 원 안팎으로 나쁘지 않았다. 도사왈 '응~~ 아마 50 이전에 한국으로 돌아올 거야~'라고 했다. 그리고 '집도 장만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난 조그마한 집을 장만했고 그 집에서 잘 살고 있다. 나의 최대 관심사 우리 '거주지'를 마련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더 이상 남창도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잘은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

.

.

그렇게 한동안 시간은 물 흐르듯 흘렀고 난 남창도사를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2024년, 9월, 이번 추석 때 친정집에 딱 2박 일정으로 다녀왔다. 짧고 굵게 효녀, 사위, 손자 노릇하러 막히는 고속도로를 뚫고자 밤 9시에 출발해서 새벽 2시에 도착했다. 애절이와 병철이는 점점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갔다. 이전처럼 새벽에 일어나 우리를 반겨주지 못했지만, 난 오히려 그게 더 편했다. 코코를 내려놓고 집을 대충 정리한 뒤 조용조용히 거실을 다니며 잠자리를 준비했다.

 

다음날 아침 부엌에서 큰 전기 팬과, 채반 등을 꺼내어 음식 장만을 준비 중이었다. 그때 남편이 갑자기 애절이 한테 '장모님, 저기 그 남창 도사님이 추석 때도 좀 뵐 수 있나요?' 애절이는 급 당황해하면서 '아, 거기 전화번호 줄 테니 한번 연락해 보게나'라고 말했다. 결국 내가 전화를 했고 원래는 손님을 받지 않는데 애절이 가족이라서 특별히 받아 준다면 10:30분까지 오라고 했다.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남편과 나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다행히 추석 전날인데도 차는 막히지 않았고 20분 거리였다. 남편에게 물었다.

나: "갑자기 왜?. 무슨 일 있어?
남편:"정년 나이도 있고, 언제까지 일할 수 있는지도 궁금하고 해서.. 그리고 그때 우리 집 살 때도 맞췄잖아. 어떤 분인지 궁금해".
나: " 아.... 애절이 혼자 전하고 부침개 다 못할 텐데.. 빨리 다녀와야겠다."


도사님 머리는 짧아졌다. 수염도 짧아졌다. 외모도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아무리 도사님이라도 세월은 비껴갈 수 없었나 보다. 비용은 2.5배나 올랐다. 흐미.. 이전과 마찬 가지로 휘파람을 불고 우리를 불렀다. 1시간 남짓 그는 엄청난 많은 말을 했다. 특히 그의 딸 자랑, 아들 자랑을 많이 했다. 우리는 허리가 아팠다. 바닥에 오랫동안 앉아 있자니 온몸이 쑤셨다. 도사님은 내가 궁금해하거나, 남편이 궁금한 것을 시원하게 답변해주지 못했다. 지극히 현재 우리도 다 알고 있는 말을 많이 했다. 한 시간 동안 들은 내용이 명확히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직 도사님 자랑 이야기만 기억이 났다. 손님들 중 비행기도 타고 오고, 자기가 부자로 많이 만들어 줬다는 이야기. 느닷없이 나보고 유학원 같은 교육 사업을 하라고 했다. 왜 공부를 끝까지 하지 않았냐고 야단도 쳤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AI 시대에 역주행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둘 꼴이 우스웠다.


남편과 나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한 없이 웃었다. 우리가 결혼하고 나서 수중에 정확히 현금 4천만 원이 있었다. 그걸 기점으로 모으고 모아 겨우 집 한 채를 장만했다. 우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하는 시점임을 우리 스스로가 느끼고 있었다. 남편도 나도 어쩌면 어떤 명확한 인생의 로드맵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벌써 정년 퇴임을 걱정할 나이가 되었고 나는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데 말이다.


어쩜 남창 도사는 그대로였을지도 모른다. 30대 때 한없이 앞길이 막막할 때 잠시나마 도움이 되었던 그의 희망적인 말 '곧 집은 장만할 수 있을 거야'라는 말이 긴 여운을 남긴 것 같다. 이번에도 마찬 가지였다. 한국에 잘 왔고 앞으로 어려운 고비가 있지만 치열하게 살다 보면 다 지나간다고 말해 주었다. 정답다운 정답이었다.  


남창도사가 사주를 잘 맞추고 못 맞추고 떠나서 몇 년 동안 그가 해준 말을 생각해 보면, 참 괜찮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언제나 희망적이고 나쁜 일도 그것을 계기로 더 좋아진다는 말을 항상 되풀이 한 사람 같다.


집에 오니 애절이가 부엌일을 혼자 한답시고 날리 법석이었다. 애절이는 너무나 궁금한 눈빛으로 '뭐래?'라고 물어보았고 난 ' 응, 이제 그냥 그런 거 같아. 잘 모르겠어.'라고 대답했다.


만약 정말 남창 도사가 미래에 대해 읽을 수 있다면 그는 로또 번호도 맞출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믿음은 아주 오래전에 그의 말 한마디 '집을 장만할 수 있다'라는 확언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와 남편은 또다시 불확실한 미래가 걱정이 되어 '잘될 거야'라는 안도감을 느끼기 위해 추석날 그를 찾은 것 같다.


남편에게 말했다.

" 이제 우리 좀 가볍게 살자. 이것도 저것도 해보면서. 인생은 도전이야."

그가 말했다.

" 꿈에서 살지 말고 현실에서 좀 살아봐~ 현실은 돈도 필요하고 노후 대책도 해야 해. 방법을 좀 찾아봐야겠어"


그와 난 함께 삶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든다. 그는 비록 내가 꿈속에 살고 있다고 하지만, 난 지극히 현실을 살고 있고 그곳에서 내 아이를 지킨 것 같아 요즘 기분이 꽤 보람차다.


남창 도사님!!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사업번창하세요~~ ㅎㅎㅎㅎ




by Onpenchoi.




매거진의 이전글 보글보글 끓는 마음 들여다 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