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ON Pen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oi Nov 20. 2023

우리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살 수 없는 코트라 했다.

그의 말이 철학 처럼 들렸다.

동거남은 지금 온 세상을 다 가진 기쁨이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행복하다. 밝디 밝은 해맑은 큰 얼굴로 주말 오후 내내 싱글 벙글이다.


동거남의 기쁨이 철철 과하게 넘쳐난 나머지, 불편한 장모님과 화상 통화 중 사각 팬티 위에 오늘 새로 구입한 코트를 입고 나와서 빙 한바퀴 돌고 있는 중이다. 코트 기장이 약간 길어서  그의 사각 점무늬 팬티는 잘 숨겨졌다. (나 사실 무지 놀램)


그에 맞장구치며 울 엄마는

'박서방 거기 위에 스카프 하나 하면 더 멋있겠다~~.'


그 말이 떨어 지자 마자 안방으로 들어가 베이지색 목도리까지 두르고 나왔다. 코트 아래에 약간 보이던 흰색 런닝구와 그의 사각팬티는 완벽히 가려졌다.


뒤에서 돋보기를 껴고 핸드폰을 하던 울 아버지도 한수 더 거들었다.

'이야~ 그게 4900원이라고? 멋지다야'

울 아버지는 서울에 저런 가격의 옷이 파는 곳이 어딘지 무척 궁금해하셨다.


저녁 식사 후 나의 안부 통화는 결국 동거남이 새로 구입한 4900원짜리 코트 패션쇼 런웨이로 끝이 났다.


울 부모님 조차도 손자 안부 묻는 것을 잊을 만큼 '4900원짜리 코트'라는 놀라움에 매우 흥미진진해 하셨다.


4900원 짜리 코트


'이게 말이되?'

'말이 안 되지?'

'이 옷을 67만 원 주고 산 사람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 (정가 태그 가격)

'아.. 이건 무조건 사야 하는 거야'


'왜? 무조건 사야 하는 거야?'


'4900원으로 어떻게 코트를 사?'


'이건 그냥 사야 해. 너도 사 하나?'


'나 필요한 거 없는데?'


'그래도, 찾아봐.'


'엄마, 나 이거 두벌 사줘.'


'어?'


'5천 원도 안 하잖아'


'나 후드티 하고, 파랑티 하나만 사줘'


(그렇지.. 말이 안되지...)


아들이 직접 고른 4900원 짜리 후드티

나도 놀랬다.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한국 와서 처음 5개월 정도는 물가에 대한 감각이 없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가전제품을 구입하러 가서 '혹시 신혼 이세요?'라는 말까지 들었다. 할부로 계산하지 않고 일시불로 계산해서 그랬던 것 같다. 한국 정착비용으로 목돈이 훅훅 깨졌다. 덕분에 1년 동안 '손가락을 빨고 산다'는게 무엇인지 몸소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절약이라는 개념도 이때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사계절이 여름, 여름, 여름, 여름인 곳에서 10여 년을 넘게 거주했으니 겨울옷이 있을 리가 없다. 아이는 자랐고 남편님은 출근을 하니 옷이 또 필요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공존하는 한국의 일 년은 빛의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 겨울이라니. 겨울옷값은 비싸던데. 지출 비용도 함께 빛의 속도처럼 초과된다.


아이 학교 콘서트 때 필요한 검정 셔츠와 바지 그리고 구두가 필요했다. 집 근처에 아울렛이 2군데 있다는 사실을 올해 처음 알았다. 새로 알게 된 아울렛이 집과 훨씬 가까웠다. 세일을 80프로 까지 한다고 해도 기본 만원은 했는데, 정말 전 품목이 4900원이었다. 여름 반팔 티가 아니라 겨울 코트, 점퍼, 재킷, 패딩재킷, 후드티, 맨투맨티, 셔츠 그리고 바지 전품목까지도 4900원이었다.


믿을 수 없는 가격이었다. 학교에 필요한 옷은 잠깐동안 입는 옷이라 사실 돈 만원도 아깝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4900원이란 가격을 보는 순간 나의 눈은 뒤로 뒤집혀졌다. 상하 두벌을 구입해도 만원이면 된다. 초록 지폐 한 장이면 된다는 뜻이다.


그 옆에서 나보다 더 흥분한 사람은 나의 동거남이었다.


아이 옷 사이즈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찾았다. 환희에 찬 기쁨의 얼굴로 검정 셔츠와 바지를 골라 들고 아이를 불렀다.


이 와중에 동거남은 입고 있던 후드티를 벗어던지고 본격적인 패션쇼를 하고 있었다. 큰 거울 앞에서 걸려 있는 코트를 색깔 별로 입어 보고 있었다. 그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평상시 결코 볼 수 없는 그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4900원짜리 코트를 꼭 사고 말겠다는 그의 결의가 보였다.


옷을 입고 벗고 귀찮아하던 그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마치 모델처럼 옷을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며 사이즈를 찾고 있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빨간 소쿠리 안에 옷 두어 벌을 넣고서는 상기된 얼굴로 나를 불렀다. 빨리 골라 달라는 눈빛이었다. 다시 다른 옷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조급함이 엿보였다.


아이를 불러 옷을 입혀보고 사이즈를 체크하느라 귀찮은 나머지 무조건 다 괜찮다고 했다. 그는 다시 거울 앞으로 다가가 4900원짜리 카키색 가죽 재킷까지 입어 보고 있었다. 유난히 배가 더 나와 보였다.


그 옷만큼은 차마 괜찮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4900원짜리 가죽 재킷이지라지만, 그와는 분명 다른 세계 남자가 입어야 할 옷이었다. 예를 들면 바이크 족 같은 분들 말이다.


'그냥, 그 아까 그 남색 체크무늬 코트가 제일 이쁜 거 같아'라고 친절하게 말해줬다.


기분이 좋아진 그는 자꾸 나도 하나 고르라며 부추긴다. 한 달 한 달 생활비가 넉넉한 편은 아니라서 잠깐 고민을 했다. 요가 다니면서 입고 다닐 가벼운 점퍼가 필요하긴 했다. 게다 내가 좋아하는 블루 계열 재킷이었다. 한참을 망설였다.


미니멀은 아니지만 미니멀을 지향하는 삶을 선택하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정말 꼭 필요한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굳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았다. 5000원도 안 되는 가격. 심지어 커피 한잔 가격 보다도 싼 가격이었다. 생각해 보니 별다방 커피를 끊은 지도 1년이 넘었다.


사지 않겠다고 했다.


그가 다시 4900원짜리 재킷은 앞으로 우리가 살아생전에 볼 수도 살 수도 없는 가격의 옷이라고 했다. 게다 새 옷이라고 했다. 살아생전이란 말이 와닿았다. 4900원짜리 뽀글이 재킷과 코트를 어디서 또 볼 수 있을까? 중고사이트면 가능하겠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5000원짜리 재킷 하나를 구입할까 말까 하는 나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4900원이란 가격으로 이 옷을 판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에 나는 고민까지 덤으로 하고 있었다. 그것도 신중하고도 골똘히 말이다. 심지어 미니멀의 철칙! 이 옷을 구입하고 옷장에 옷을 하나 버려야 한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이전에 나는 4900원짜리 옷을 보았다면 아마 생각 없이 그냥 구입했을 것 같다. 달라진 나의 모습은 가격과 상관없이 먼저 나에게 필요 한지 아닌지를 따지고 있었다.


그러다 '굳이'를 따지자면 사실 필요 없었다. 하지만 옷을 안 사본지도 꽤 오래되었고 '이번생에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4900원짜리 옷'이라는 그의 말에 강하게 흔들리고 싶었다. 남들은 명품관이나 유명 브랜드에 가서 플렉스 한다는데...


'4900원짜리 푸른 뽀글이 재킷'정도는 나도 플렉스 해도 되겠지란 생각이 들었다.


푸른 뽀글이 재킷 4900원

동거남 코트 4900원

아이 후드티 4900원

맨투맨티 4900원

검정 바지 4900원

셔츠 4900원


토탈 3만 원 정도의 쇼핑을 마치고 저녁은 집에서 먹기로 했다.


요가 할때 입고 다닐 4900원 짜리 뽀글이


20여 년을 함께 살면서도 먹는 것 이외에 이토록 행복해하는 그의 얼굴을 마주 한 적이 없다. 생각해 보니 작년에 떨이로 파는 오리털 롱 패딩을 2만 원에 구입한 적이 있다.


그때도 그는 매번 패딩을 꺼내어 입을 때마다

'한국에서 옷은 제 돈을 주고 사면 바보야 바보'라고 노래 부르듯이 말을 했다.

이번에 구입한 옷은 '4900원짜리 코트'다.

그가 그토록 입고 싶어 했던 코트이니 오죽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4900원짜리 코트'의 파워는 장모님 앞에서 까지 패션쇼를 할 수 있는 기쁨과 용기를 그에게 안겨 주었다.



아침부터 가족을 위해 열심히 앞을 보고 달리는 그가 '4900원'이란 가격의 옷을 보고 왜 이토록 기뻐할까 잠깐 생각해 보았다. 허긴 울 아빠도 좀 그런것 같다. 그럼 남자들 대부분 저정도로 기뻐 한다는 뜻인가? 그럼 우리 아들도?????


옷장에 걸려 있는 '4900원짜리' 나의 파랑 뽀글이를 꺼내어 보았다.

이 옷이 앞으로 내 생에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가격으로 산 옷이라는 거지?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웬지 애착이 더 갔다.

정말 앞으로는 두번 다시 살수 없는 가격에 이 뽀글이를 구입한것 같다. 나도 웬지 무엇가를 이룬 성취감이 느껴 졌다. 이거 뭐지?


아마 재고처리 과정 중 페기처분 당할 옷이었던 것 같다. 유행이 지났거나 더 이상 팔 수 없는 옷들 말이다. 중고도 아닌 새 옷을 이렇게 내다 파는 아울렛이 감사했다. 우리 가족처럼 겨울옷이 대거 필요한 입장에서는 마치 로또를 맞은 것 같았다.


이번달 치과 비용 때문에 생활비를 또 초과하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기특한 '4900원짜리' 옷들이 그 차이를 좀 메꿔 준 것 같아 나 역시 기분이 째졌다.


세월이 좀 지났으면 어때?

유행이 좀 지났으면 어때?

이번 겨울 따뜻하게 나와 우리 가족을 감싸줄 수 있으면 난 그걸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감사한 하루다.


by Choi.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이 쓰고자 하는 책의 값어치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