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감대로 저녁에 눈이 왔다.
쭉쭉 스크롤을 넘기며 저장되어 있는 글감들을 노려봤다. 적고 싶은 소재를 물색한 다음 쓰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쓰고 덮고 다듬고를 반복했다. 끝날 기미도 보이지 않는 수정에 또 수정. 아 정말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는 거지. 그런데 묘하단 말이야. 이토록 한곳에 집중을 해서 글인지 떡이지 뭔가를 하나 만들어 놓고 나면 혼자 벅찬 감동이 밀려와 우쭐되고 있단 말이지. 그러다 곧 멈칫한다. 너무 기분이 좋으면 안 돼. 기분과 마음을 살피는 오래된 습관 중 하나는 본능적으로 나를 알아본다. 분명 안개처럼 자욱하게 가라앉는 감정이 귀신처럼 달려오니 적당히 자제하고 식기세척기 세제나 쓱쓱 잘라야겠다. 그래도 이번 연재글은 적으면서 나도 웃음이 연발 터져 나왔다. 그 레깅스는 옷장 안에서 나를 영원히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영. 원. 히. ㅎㅎ
쓱~탁. 쓱~탁.
식기 세척기 세제를 반으로 두 동강 내는 소리다. 연재글을 마치고 맥없이 탁 풀어지는 정신을 망나니처럼 흩어지는 게 싫었다. 대단한 글도 아니다. 책을 쓰는 것도 아니다. 엄청난 감동을 주는 글도 아니다. 하지만 '브런치스토리'안 나의 쪽방에서 소소한 재미와 웃음을 나누고 싶다. 나의 삶이 반정도는 어찌 보면 코미디 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모든 삶이 그렇듯 마냥 즐겁기만 하지는 않았다.
아이가 어릴 쩍, 이른 아침 학교에 드롭하고 엄마들과 커피타임을 가질 때 물 위에 동동 떠다니는 기름 같은 나를 보면서 '난 안 되겠구나'를 일찌감치 알았다. 급한 일이 있다고 뻔하디 뻔뻔한 '뻥'을 치고 커피숍을 나와 집으로 향하는 도중 마음에 진짜 커다란 구멍이 '뻥'하고 뚫린 날. 앞이 캄캄했던 그런 날이 내게도 있었다. 잘나서도 아니고, 못나서도 아니고, 사람과 함께 더불어 사는 게 뭔지 몰라서였다. 아줌마들과의 관계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는 인간관계와는 사뭇 달랐다. 그들만의 세계에는 아이까지 엉키고 설켜서 가위로 싹둑 잘라 낼 수 없었다. 그렇게 하다간 교민사회에서 아이도 나도 위험했다. 살아있는 인간들 사이에서 나도 살아남기 위해 고된 인간관계를 하루하루 숙제처럼 풀어나갔다. 오랜 세월이 걸렸고 그 끝에는 결국 나의 문제임을 알았다. 난 대성통곡을 했다.
요가를 시작하면서 요가하는 분들과 인간관계가 다시 시작되었다. 어찌 보면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바깥세상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고도로 집중을 하면서 세제를 반으로 잘라야 하는데 오늘따라 오만 잡생각이 불쑥불쑥 튀어 오른다. 요가 연재글 이후 요가에 대한 조각의 생각들이 딸려 와서 그런가 보다. 분명 난 정확히 반을 겨냥하고 칼을 위에서 아래로 쭉 밀고 내려갔지만, 대각선으로 삐뚤게 잘렸다. 에라 모르겠다.
요가수업에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참 많다. 어디 어디가 아파서, 허리가 굽어서, 뇌경색을 앓다 병원 퇴원 후 그 뒤로 계속 쭉 요가와 수영을 하시는 할머니부터 다양한 그들의 삶과 아픔이 함께 요가수업을 한다. 난 뒤에서 조용히 나를 본다. 난 젊은 사람이다 . 숫자로 수치화해서 생각해 보면 그들은 앞으로 짧게 잡으면 10년에서 20년, 길게 잡으면 90살까지 30년 정도는 남았다. 나도 만약 중간에 암이 걸려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면 자유롭게 거동하기까지 20년 정도, 그리고 나머지 20에서 30년은 시간과 세월에 별 의미 없이 죽지 못해 또는 죽음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늙어가는 사람이다. 여성의 평균 수명이 85세라면 꽤 남은 세월처럼 보이지만 몸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약봉지를 둘둘 말아 집안 곳곳에 넣어두며 수시로 약을 복용하는 '복용자'의 삶을 살다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 생판 모르는 남이었는데 '요가'라는 운동을 시작하면서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그들과 나를 보면서 인간으로 태어날 때부터 죽는다는 전제하에 살고 있는 '인간'이 도데 뭔지 다시 또 궁금해진다. 밑도 끝도 없는 멍청한 생각 때문에 식기세적 세제는 삐뚤삐뚤하게 잘려 나가고 있다. 수치화로 삶을 나누었더니 좀 매정하게 보인다.
이 와중에 알람이 울린다. 무시하려다 무시무시하게 긴 빵칼을 내려놓고 확인해 본다. 이건 또 당최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인가. 눈을 다시 여러 번 깜빡깜빡해 본다. 돋보기는 아직 필요 없다. 핸드폰을 조금 멀찌감치 잡고 미간에 주름이 잡힐 만큼 힘을 준다.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설레었던 기분을 느껴볼 몇 초의 시간도 없이 눈물이 조르륵 두 볼을 타고 내려온다. 15년 넘게 해 왔던 전공을 미련 없이 땅 밑에 파묻어 버렸다. 전공과는 거리가 무지하게 멀고도 먼 글을 쓰면서 쓰레기통에 처넣었던 자존감을 다시 찾고 있는 요즘인데 그분의 비밀 응원은 '그래, 다 안다. 그래, 한번 열심히 살아보렴'처럼 들렸다. 다시 남은 식기세척기 세제를 반으로 가르기 시작했다. 어차피 정 사각형으로 자르지도 못하고 칼은 자꾸 삐뚤게 대각선으로 잘려 이번엔 그냥 아예 대각선으로 잘랐다. 어라, 완전 잘 잘라진다. 반듯하게. 융통성 없이 정확하게 자르려고 했던 나의 고지식함에 '난 아직도 멀었군'. '한참 멀었어'. 나무 도마 위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자국. 양파를 썰을걸 그랬나. 양파 때문에 눈이 매워 그렇다는 핑계라도 될 수 있게 말이다.
카디건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쳤다. 팔목이 아프다. 한통 다 썰었다. 뿌듯하다. 조금이나마 지구 환경에 보탬이 되겠지라는 뿌듯함 뒤에 다시 먹먹함이 올라온다. 그분은 단지 글이 아니라 내 '삶'을 응원해 줬다. 아는 독자들이, 친분 있는 독자들이 응원을 할까 봐 부담스러웠다. 애초에 제발 그러지 말라는 쓸데없는 기도도 했다. 스스로 일어나고 싶었기에 그 기도는 매우 간절했고 통한 듯했다. 그놈의 호기심에 그냥 뚝딱 절차대로 응원기능을 설정해 보았다. 얼굴도, 안면도, 글로써 친분 있는 분도 아닌데, 그분은 나의 어떤 삶을 글에서 보았을까... 다시 살고 자 하는 나의 의지를 보았을까. 중년 막바지에 겨우 삶을 알게 되어 남은 20년이라도 한번 제대로 살고 싶다는 이 아줌마의 간절하고도 애절한 마음을 어떻게 보았을까. 아니면 아픔을 보았을까. 삶에 덧없음을 남들보다 조금 일찍 알아 버렸기에 포기했던 삶을 다시 이젠 정말 살아 보자라고 덤벼드는 나를 보았을까. 아니면 덤벼들다 다시 지쳐 나가떨어지고 있는 나의 나약함을 보았을까. 분명 그분은 나를 보았다. 나의 직감으로 알 수 있다. 서툰 글에서 나를 보았음이 느껴졌다.
세제를 쓸고 나면 가루들이 도마위에 흩어져 있다. 그 가루들을 식세기 안에 휙 뿌렸다. 많은 사람들이 식기제척기 세제를 잘 자를 수 있는 칼이 없는지 궁금해하는데 내가 알려 줄까 말까 고민하다 여기서 알려 줘야겠다. 비법은 빵칼이다. 톱니칼. 빵칼로 한방이면 다 잘린다. 오돌돌 한 오돌돌 한 면이 다른 그 어떤 칼 보다도 단번에 ‘쓱’ 하고 베어진다. 마지막에 나무 도마 위로 ‘탁’하는 소리와 동시에 세제는 두 동강이 난다. 세제 겉 표면에 비닐 같은 것이 질기게 너들 너들 붙어 있을 때는 칼로 한 번만 앞 뒤로 왔다 갔다 하면 바로 끊어진다. 생각을 그만 끊어야 겠다. 여기까지. 지친다.
주방을 마무리해야겠다. 눈이 오려나. 날씨가 회색이다. 꾸리꾸리한데 쌀쌀맞은 날씨다. 분명 눈이 올 날씨다. 저녁에 아이 라이딩도 해야 하는데 좀 번거롭겠군. 오늘은 달달한 맥심을 한잔 해야겠다. 아이 간식으로는 냉동실에 소분해서 얼려두었던 피자를 꺼내놓았다.
감. 사. 합. 니. 다.
by 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