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ON Pen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oi Jan 09. 2024

고맙다! 눈사람 함께 만들어줘서.

치사하다. 너

<대문사진: pinterest>

"앞으로 더욱더 우리랑 안 놀 수도 있어.
그러니 빨~~ 리 도서관 다녀와서 놀이터에 가자."
"응. 알써."


허연 눈빨이 쉼 없이 날리는 날 중딩 아들이 놀이터에 있다.

웬일로 몸을 움직여 나갔고

추억하나 남기고 싶은 애미가 남편에게 건네는 말이다.

급박하다.

적고 보니 나도 어쩔 수 없는 '엄마'네.


눈바람을 헤치고 서둘러 도서관에 책을 반납했다. 간 김에 읽고 싶은 책 두어 권도 다시 빌렸다. 이럴 땐 코앞에 도서관이 있어 생활환경의 중요성도 다시 한번 느껴본다.


함박눈이다. 한국 와서 이렇게 많은 눈을 처음 본다. 2년 만이다. 온 세상이 다 하얗다. 대설 주의보가 떴다.


대부분 엄마들이 열변을 토하는 그 무서운 중딩이 현재 방학중이다. 사실 그렇게 무섭지는 않다. 단지 쌍두문자가 입안에서 자주 맴돈다. 내뱉지는 않는다. 꿀꺽꿀꺽 몇 번을 삼켰다. 삼켰더니 속이 뒤틀린다. 열불이 나서 냉수 대신 시원한 토마토 주스를 여러 번 갈아 마셨다. 믹서기를 꺼 내는 과정이 귀찮아서 통으로 씹어먹던 토마토를 윙윙 대차게 갈아 마셨다. 캬~!! 냉수보다 시원하고 맛이 좋아 심신이 금방 안정된다. 일주일에 한 박스(3킬로)는 먹는 것 같다. 당근도 생으로 와그작 와그작 씹어 먹었다. 고구마도 생으로 툭툭 끊어 먹었다. 그렇게 마음을 돌보았다.


아이 이마에 여드름이 올라온다. 목소리도 변하고 있다. 집 밖이란 세상이 더 이상 아이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아이는 그야말로 문 뒤쪽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이노무 'ㅆㄲ'라는 쌍욕이 나오지만 고상한 척하며 참았다. 참을 '인'을 이마에 새겼다. (잘 못 참겠다. 집에서 내쫓고 싶다.)


아이는 온몸으로 '사춘기'를 받아들이는 중인지 뭐하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답답해한다. 그 답답함이 뭔지 알 것도 같지만 섣불리 안다고 말은 못 하겠다. 나 역시 정적인 요가로 부족하다. 남편과 저녁마다 마실을 나갔다. 낯선 그녀와 함께한 무인 커피숍을 알려주었다. 남편이 매우 흡족해 한다. 24시간 열어서 좋았다.  

오! 눈이다~~

새해가 밝았다. 눈이 계속 펑펑 내린다. 느지막이 일어난 중딩도 창 밖을 보더니 쉰 목소리로 "와, 눈 온다"라고 한마디 툭 내뱉는다.


이 때다 싶어

" 밖에 나갈래?"

"아니, 싫어."

"왜? 눈 좋아하잖아. 엄마 아빠도 같이 나갈게."

"왜? 뭐 하게?"

"어... 우리 셋이서 눈사람 한번 만들어 보자. 우리 한국에서 이런 함박눈 첨이잖아."

"그래? 러시아에서도 눈 많이 왔었잖아. 아 귀찮은데... 옷 많이 입어야 하잖아."


이쯤에서 (야, 이 ㅆㄲ야, 추운데 옷 처 입고 나가야지, 그럼 벗고 나갈래?)라고 말하고 싶지만

"엄마가 옷 골라 주께, 짧은 패딩 입으면 되잖아~"

라고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꼬셨다.


그제야 몸을 움직인다.


"놀이터에 가있어, 나가는 김에 도서관 책 후딱 반납하고 올께."

"도서관 따라갈래?"

"아니."


"남편아, 빨리 다녀오자. 저 녀석 맘 변하기 전에~~"


매정한 놈. 이런 아들이 아니었는데. 요 근래 배신감을 자주 맛봤다. 쓴맛이 나서 생고구마를 더 툭툭 끊어 먹었다. 홀로 '내 인생 찾고 싶어라~'라는 자작시 같은 노래가 저절로 쏟아져 나온다. 한동안 맘에 평화가 꽤 오랫동안 지속된다 싶었다. 그럼 그렇지... 사실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훌쩍 떠나고 싶다. 돈 벌 능력도 안되고 혼자 어디 갈 곳도 없다. 여기서 나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아이가 홀로 큰 눈을 굴리고 있다. 집에서 생수 한 병을 가지고 내려왔다. 아이와 아빠가 나누어 마신다. 한 번씩 돌아가면서 더 크게 굴린다. 아파트 주변 어린아이들이 한두 명 나온다. 우리 중딩이 제일 큰 아이다. 우리 세 식구는 민망함을 뒤로 한 채 더욱 크게 굴리고 굴렸다. 얼굴이 벌겋게 달라 올랐다.


어디다 위치를 잡을지 정했다. 그쪽으로 셋이서 힘껏 또 굴렸다. 눈이 그렇게 무겁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아빠가 귀를 붙였다. 아이가 얼굴을 만들기 시작했다. 발도 만들었다. 귀여운 눈사람이 완성 됐다. 옷은 다 젖고 몸에는 열이 올라와 땀으로 범벅되었다. 기념사진도 한 장 찰칵 찍었다.

억지로 한컷!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컸다. 아이가 스스로 컸는지, 내가 키웠는지, 아이가 나를 키웠는지, 세월이 키웠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아이가 컸고, 커가고 있다. 떠날 준비를 한다. 난 보낼 준비를 한다.


앞으로 5년 남짓 남았다고 숫자로 이야기했다. 아이도 순간 놀래는 눈빛이다. 5년 동안 공부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시간관리, 건강관리, 먹는 음식 관리를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고 일러두었다. 홀로 세계에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한 아이를 내가 독립된 인간으로 키운다는 것은 망상이다.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사고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며 자기 세계관을 형성 중이다. 엄마인 난 의, 식, 주를 제공하고 내가 가진 인생관과 철학을 자주 주입하기도 했다.


그래서, 미안하다. 나름 의, 식, 주는 그런대로 보조해 준 것 같다.


만약 내가 주입시킨 인생관과 철학이 너의 인생에 도움이 조금이나마 된다면 다행일 텐데 나도 잘 모르면서, 아는 게 그것뿐이라 그만큼 밖에 알려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러니, 아들아.

엄마가 틀릴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으니,

엄마를 너무 의지하지도,

믿지도 말기를...

아마 엄마도 엄마에게 이로운 쪽으로 너를 양육했을 가능성이 거의 99.9프로 이니깐..


너의 인생은 네가 개척해 나가기를

바란다.


2024. Jan

by choi.


 





매거진의 이전글 자기 개발서 책을 읽고 종이신문을 구독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