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팔아 스토리를 쓰다.
최사장이 넥타이 매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교복에 넥타이가 있었거든요. 그 딸은 한번 메어준 넥타이를 그대로 벗어 조였다 풀었다만 합니다. 최사장은 딸 구두를 항상 닦아주고, 딸 방도 항상 정리해 줍니다. 그 덕분에 그 딸은 정리정돈이 뭔지 알지 못하는 왈가닥이 되었고, 결국 그 딸은 정리정돈 끝장나게 잘하는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현재 남편이 정리를 하다 하다 포기한 채로 그 여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 여인이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그 아들 역시 엄청납니다. 가끔 최사장 딸은 마구간이 된 아들 방문을 아무 말 없이 지긋이 닫아 버립니다.
친한 동생이 저희 집을 방문 후
"언니, 언니 아저씨는 언니를 무척 사랑하나 봐~." 하더군요.
전 한없이 웃었습니다. 그 친구 한 깔끔하는 친구인데 얼마나 놀랬겠어요. 저희 집을 보고. 하하하
그래서 그날 저녁 물어보았어요.
"나를 아직도 그렇게 싸랑해??"
남편 왈
"그냥 정리 정돈을 포기했을 뿐이라고.”
그리곤 씨익 웃음을 짓더군요.
이렇게 밝고 철없는 딸을 애지중지 키우던 최사장은 개천에서 용 난 사람이었습니다. 판잣집에서 태어나 대학을 수석합격 수석 졸업 후 한평생 한국회사, 외국회사에서 일을 했고 그 옆에서 송여사가 돈을 열심히 굴렸습니다. 그가 벌어온 돈을 주식, 부동산을 해가며 알뜰살뜰 열심히 굴렸습니다. 미술학원도 운영했습니다. 그러다 송여사는 집도 한채 짓더군요. 덕분에 이사를 참 많이 다녔습니다. 대학생 때 울산을 한 번씩 내려갈 때마다, 일 년에 한 번씩 집을 옮겨 나중엔 집을 못 찾아갔습니다. 저에게 이사를 했다고 통보만 했고, 어딘지 알려 주지도 않았습니다. 방 한 칸짜리 월세부터 세 칸짜리 전세까지. 송 여자는 더 이상 학교 선생님이 아닌 복부인이 된 듯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억척스럽게 1남 1녀, 두 자녀를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지금 그 자식들은 각각 해외 거주 중입니다. 한놈은 뉴질랜드에 또 다른 한놈은 베트남에.
최 사장과 송여사는 한동안 태국에 18년 거주 한 경험도 있습니다. 3년 전 은퇴를 하고 노 부부는 요즘 한국에서 알콩 달콩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 코비드 때문에 더욱 확 찐 사람이 되어 매일 운동한다며 사진을 보내옵니다. 최 사장은 수염까지 길렀더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갓을 씌운다면, 저 옛날 서당에서 '한늘~천 따~지'를 가르치던 서당 할아버지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상복, 특히 두꺼운 파카를 입고 외출을 한다면, 노숙자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차라리 '의복을 한복으로 바꾸면 어떠하겠냐'라고 조심스레 제안을 했습니다. 전 괜찮은데...
송여사가 최사장과 함께 다니기 싫다고 자꾸 앙탈을 부립니다. 그녀에게 외모는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이며 그녀의 삶에 꽤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미대 나온 여자 답지요. 여하튼 두 사람 무진장 이쁩니다. 송여사 자식사랑이 끓어오르는 용광로와 같다면, 최 사장 자식 사랑은 화산 속의 라바와 같습니다.
송여사는 울산 주변 지인과 동네 사방팔방에 베트남에 살고 있는 딸이 작가가 되었다고 생중계를 하고 다닙니다. 하다 하다 못해 뉴질랜드에 있는 동생 내외한테 까지 자랑을 합니다. 제가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제 나이 마흔 중반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안 그래도 갱년기가 시작되어 한 번씩 화끈거리는데 송여사와 최 사장 때문에 더 화끈거려 밤에 잠을 못 잘 정도입니다. 아직도 그들 눈에는 제가 작고 여린 왈가닥 여자아이, 그들의 딸로 보이나 봅니다.
코로나로 그 두부부를 못 본 지 1년이 넘어갑니다. 2주간의 격리를 생활화 하기 시작하고 베트남에 오고 가는 사람들도 제법 있지만, 비자가 잘 나오지 않는가 봅니다. 확실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의 가족사를 한번 풀어 보았습니다. 그립기도 하고 보고 싶기도 하고.
그 두 분이 제 옆에 항상 있었으면 해서...
제가 왜 늦게 철이 들었는지도 이젠 알겠지요? 넘쳐나는 사랑을 받으면 이렇게 된답니다.
어느 날(아니 맨날) 미친 듯이 내리쬐는 햇볕 아래에서 혼자 해보는 공상.
고언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