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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삼킨 마음

나를 잃어버린 어느 날.

나를 위한 연민을 채워 주는 것은 오직 글뿐.

by Choi

그 어떤 것을 부정하고자 몸부림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 세계, 한때는 내가 살았던 그 세계를 부정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하얀 백지에 깨알처럼 박혀 있는 글들을 정신없이 읽어 내려갔다.


흡혈귀가 피를 보고 허겁지겁 달려들어 붉은 피를 한 번에 쭉쭉 빨아들이고 있는 것과 흡사한 나의 모습.

하얀 목에 툭 튀어 오른 핏줄을 보고 감춰두었던 송곳니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뒤 상대가 누구인지는 전혀 상관없이, 이성도, 감성도 없는 오직 동물적 허기와 집착 본능에만 의존한 체 한 번에 모든 피를 흡입 해 버리는 드라큘라.


집히는 데로, 골라지는 데로 읽고 읽고 읽었다. 읽다 잤고, 읽다 먹었고, 읽다 빨래를 했다. 굶주린 사람처럼. 누르고 눌러버린 눈물이 두 불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라 두 눈동자 뒤로 꼴까닥 넘어가 버려 목구멍으로 주르륵 미끄러지듯 넘어 간뒤 사라진다. 결국은 터트려질 듯 하지만 다시금 꾹 하고 삼킨다. 책 뒤에 숨어 버린 나의 자아를 보았다.


거실에서 도리토 매운맛 과자를 야무지게 야금야금 오도독 깨어 먹으며 온라인 강의를 듣고 있는 아이, 쉬지 않고 흘러가는 초심과 시곗바늘, 그 어떤 것도 상관없다는 듯이 내리쬐는 햇빛, 우둘둘 돌아가는 에어컨 실외기 소리. 쉴세 없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천장에서 돌돌 돌아가고 있는 회전 팬.


화창하게 내리쬐는 햇볕은 잔인할 만큼 뜨겁고 밝다 못해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창고 안에 긴 호수를 꺼내어 퍼석해진 화분 안 흙을 흠뻑 적셔주었다.


올라오는 어둡고 습한 감정을 한껏 삼키고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린다. 읽고 또 읽고 다시 그렇게 읽었다.

앞이 흐리멍텅해질 정도로 뛰고 있는 심장을 다섯 손가락으로 꾹 쥐어짰다.


결국은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 한 번씩 찾아오는 이 고비를 넘기고 나면 곧 괜찮아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이 병 같지도 않은 이 병을 난 다시 맞닥뜨렸다.


나란 인간을 잃어버린 시간.


순간 섬광 같은 깨우침이 스치고 지나가는 날도 있지만, 결국은 글을 쓰는 이 행위가 나에게 연민을 가져다줄 것임을 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대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 숨고 싶지 않은 어느 날...


당신에게도 그런 어떤 날이 있나요?

사진 출처 pint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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