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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갱 Jul 13. 2020

#일상 - 무제 001

무제

간만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먼지가 앉은 연습장을 꺼냈다.

간만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연필꽂이가 어딨는지를 찾았다.

간만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무엇을 그려야 할지를 생각해보았다.


잠시 생각.


무언가 그리고 싶은 게 떠오르지 않을 땐 내 눈앞에 보이는 게 낫겠다 싶어 왼손을 보면서 슥삭슥삭 샤프선을 내질렀다.

그렇게 내지르는 선 위로 샤프심의 서걱거림이 들렸다.

일부러 틀어놓은 잔잔한 피아노는 어느새 들리지 않는다. 그냥 샤프의 서걱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형태를 잡아가던 손이 이내 멈췄다.

간만에 내지른 선이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잠시 생각.


다음 장으로 종이를 넘겼다.

다시 그리려고 보니 이미 손은 시시했나 보다.

무엇을 그려야 할까.


잠시 생각.


이내 책을 덮고 샤프와 함께 책상 한 귀퉁이에 내버려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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