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감의 동의어는 개성 없음이다. 예민의 동의어는 자기다움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내 대답은 확고했다.
나는 딱히 싫은 게 없는 사람이었다. 'A가 좋아 B가 좋아?'라고 누가 묻는다면, 질문의 유형을 막론하고 내 대답은 항상 '다 좋아'였다. 입는 거, 먹는 거, 자는 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적 문제까지, 세상만사 내 심기를 불편케 하는 것은 없었다. 나는 무던한 사람이었다.
사회생활 초반에는 그런 내 성향 덕분에 인공지능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나는 정말 다 좋아서 좋다고 했던 건데, 선배들 눈에는 사회생활하느라 마음에도 없는 입 발린 소리 하는 것처럼 들렸나 보다. 하긴,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의견 없이 '다 좋다'라고만 하는 신입사원을 보면 누구라도 연민의 감정을 느낄 것이다. '눈치 보느라 많이 힘든가 보다'라는 동정의 시선도 많이 받고, 좀 더 자신감 가져도 된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다 좋았고 다 괜찮았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괜찮아서 괜찮다고 한 건데 괜한 동정을 받게 된 그 상황이 짜증 나기도 하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상황조차도 다 괜찮기만 했다. 나는 둔감하고 모가 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랬던 나에게도 점차 싫은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계기는 취향이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삶의 경험이 쌓여가는 것과 비례해서, 나에게도 취향이 생기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음식이 생기고, 좋아하는 옷 스타일도 생겼다. 좋아하는 인테리어 디자인이 생겼고, 음악 취향도 만들어졌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다 보니 내가 더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의 유형도 분간이 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신념과 소신도 점차 두터워지게 되었다. 환경 이슈에 대한 견해도 생겼고, 젠더 갈등에 대한 소신도 생겼다. 나의 성향과 가치관에 맞는 정치적 이념도 보다 뚜렷해졌다. 그렇게 나의 것, 즉 자기다움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삶에 불편한 것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게 된 시발점이었다.
요새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 중 하나는 무분별한 일회용품 사용이다. 특히, 카페에서 음료를 마실 때 사용하는 일회용 잔이 너무 싫다. 예전 같으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일회용 잔에 차 한 잔 마시는 게 별 대수냐며 무던하게 행동했겠지만 이제는 그게 잘 되지 않는다. 환경 보호라는 아젠다가 내 안에 크고 무겁게 자리 잡은 이후로, 나는 절대로 무던하고 둔감하게 행동할 수 없게 되었다.
플라스틱 잔에 아이스커피를 마실 때마다 인류 역사 이래 만들어진 플라스틱들이 지금껏 단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내가 마시는 커피를 담은 이 컵도 분명 몇백 년 이상 썩지 않고, 지구 어딘가를 아프게 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찝찝하다. 자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괜히 커피 맛도 더 떨어지는 거 같이 느껴지곤 한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에 사 마시는 커피 한 잔이 나에게는 더 이상 여유가 아니게 됐다. 점심시간 끝나기 전에 급하게 커피를 사면 분명 테이크 아웃을 하게 될 텐데, 그러면 불가피하게 플라스틱 컵을 사용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괜히 밥 먹고 커피 한 잔 사겠다는 동료분의 호의에 '저는 괜찮습니다. 커피를 아까 마셔서요!'라고 거절을 하게 된다. 그분의 호의는 잘못이 없다. 다만, 환경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도 별생각 없이 플라스틱 컵에 커피를 마시는 내 모습을 차마 용납할 수가 없을 뿐이다.
솔직히 말해서, 커피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나 나눠보자는 회사 동료분 입장에서 나는 참 까탈스러운 사람일 수 있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내 생각과 소신을 쉽게 꺾고 싶지는 않다. 나는 자기다움을 지키기 위해, 피치 못하게 예민한 사람이 되길 선택하게 되었다.
테이크아웃 잔을 줄이려고 애쓰는 내 모습을 보며 유별나다고 한 소리씩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다. 나는 내 취향과 소신을 지키며 사는 게 더 중요한 사람이 돼버렸다. 그러한 고집이 좀 더 나답고 행복한 삶을 지켜준다는 것을 점차 더 깨닫게 된 것이다.
둔감하고 무던하게 살아왔던 그때의 나는 타인의 시선과 평판에 예민했다. 나의 말과 행동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웠고, 그래서 내 행동을 제약했다. 사실, 그때의 나도 취향은 있었다. 다만, 취향대로 사는 내 모습이 평균에서 벗어날까 걱정돼 소신대로 행동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자존감 낮은 삶을 살던 모습을 '무던하다'라는 표현으로 감싸며 포장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바보 같은 짓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나를 좀 더 존중하고 사랑해야 했다. 그러지 못하고 둥글하게 이 사람 저 사람 취향에 맞춰주기만 하던 건 나 스스로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짓이었다.
이제는 반대로 삶의 많은 것들에 예민해지고, 되려 타인의 시선과 말들에 둔감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나 스스로가 너무 좋다. 나는 점점 더 좋은 게 좋다고, 싫은 건 싫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동시에, 그를 위해 무엇이 좋고 싫은지를 분명하게 알아가는 중이기도 하다.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제대로 알아야지만 자기다움을 더 단단하게 지켜낼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더 많이 경험하고 고민하면서 나에 대해 더 잘 이해해 갈 것이다. 그렇고 가장 나다운 모습이 무엇인지 알아가고, 그 모습을 잘 지켜내면서 살아내기 위해 더 노력해 갈 것이다.
둔감하고 개성 없는 사람보다는, 예민해도 나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뜬금없지만 앞으로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겠다 싶어서 글로 한 번 끄적여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