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수집 생활>
이유미 저
21세기북스
얼마 전, 이유미 작가와의 만남 '글의 맛'에 초대되었다는 메일이 왔다. 나의 '글쓰기 고민'은 무엇인지를 답메일로 달라는 내용이었다. 솔직히 이유미 작가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고, 다만 글을 더 맛있게, 더 매력적으로, 혹은 더 담백하게 쓰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만 있던 터라 글쓰기에 대한 고민이랄 게 없었다. 뭐가 문제인지에 대한 메타인지의 부족이랄까? 감상적인 글쓰기도 좋지만, 때로는 친절하게 사실에 대해 조목조목 잘 설명해주는 글도 써보고 싶고, 감성적이되 그 감정에 너무 녹아든 글이 아니라 한 걸음 물러서서 쓴 글을 쓰고도 싶다. 어쨌든,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질문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유미 작가의 최신작 <문장 수집 생활>을 구입했다.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아침 할 일을 한 후에, 소파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짧게 끊기는 꼭지들로 쉽게 읽혔다. '29CM'이라는 온라인 편집숍의 카피라이터로 일하는 그녀가 책을 읽고 밑줄을 그으며, 책 속에서 얻은 영감으로 카피를 만들어간 스토리가 담겨 있었다. 글쓰기에 대한 팁도 유익했지만, 꼭지마다 다양한 책 소개도 받을 수 있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책'이었다. 소설 속에서 독특하거나 마음에 와닿는 문장들을 적어두고, 그것을 카피로 만드는 그녀의 일이 재미있어 보였다. 책도 읽고, 글도 쓰는 일이 아닌가. 나에겐 부러움의 직업이다.(물론 카피라이터로서의 삶도 남모를 치열함과 어려움을 겪겠지만... 창작활동은 그 일이 직접이 될 때 고통스럽다.) 다행히 책을 읽다 보니 몇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나의 글쓰기에 대한 통찰을 통해 나온 대단한 질문들은 아니지만, 평소에도 종종 궁금했던 것들이 다시 떠올라 적어두었다.
책을 읽다 보니 가장 매력적인 글은 솔직한 글이라는 부분이 있었다. '이렇게 솔직해도 되는 거야?'라고 생각할 정도의 솔직함을 드러내는 것을 즐겨보라는 거다. 그녀의 첫 번째 에세이의 주제는 '발 각질'이었다고 하는데, 그 글을 쓰고 난 후에 폭발적인 반응이 있었고, 이후로는 자신의 사소하지만 솔직한 이야기를 쓰는 게 더 쉬워졌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글을 쓸 때는 솔직하게 쓰는 편인데, 더 솔직할 게 있나 싶어 생각을 해보았다. 떠오르는 주제가 하나 있었다. 아, 그 주제로 쓰는 건 좀 망설여졌다. 그래서 그 주제로 글을 짧게라도 써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친한 지인들과도 이 주제로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글로 쓰는 건 도전해보고 싶었다. 나는 말보다 글이 편한 사람이니까. 그래도 나는 낯을 좀 가리므로, 가능하면 짧은 글로 써야겠다. 부끄럽다고 생각하기 전에 후다닥!
이것은 나의 열등감 혹은 콤플렉스에 대한 이야기다. "넌 어떤 사람이 제일 부러워?"라고 물으면, 나는 남들 보기엔 좀 신선한 답을 하게 될 것 같다. "발이 예쁜 사람!"이라고. 나는 중학생 때 이미 160이 넘은 키에 발도 컸다. 운동화를 250mm의 사이즈로 신었는데, 당시엔 키가 아담하고 발이 작은 사람들이 왜 그토록 부러웠는지 커다란 내 발을 보는 게 싫었다. 어른이 된 후로는 운동화를 신으면 발이 커 보이는 게 싫어서 운동화는 가급적 피했다. 구두를 신는 걸 더 좋아했는데, 놀랍게도 245mm이던 구두의 사이즈는 지금 240mm로 작아졌다. 지극히 평범한 발 사이즈를 가지게 된 거다. 지금도 의아하다. 내 발 사이즈가 줄어든 걸까, 아니면 구두 사이즈가 조금 커진 걸까. 발 사이즈의 문제가 해결됐나 싶었을 무렵, 내 발에는 심각한 질병이 발생했다. 약을 복용하고 크림을 발라야 낫는, 다들 아는 그 병이었는데 그때부터 나의 열등감은 점차 심화되기 시작했다. 각질과 가려움은 그렇다 치자. 별 관심 없던 발을 그제서야 꼼꼼하게 보니 새끼발톱은 상할 대로 상해 있고, 매니큐어를 칠하지 않으면 샌들을 신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 글이 자꾸 길어진다. 길어지면 망설여지는데...)
지금도 내 엄지발톱과 새끼발톱은 아주 못났다. 두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의 발톱들은 본연의 예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발의 질병이 치유되고 나서도 엄지발톱과 새끼발톱은 여전히 못난이여서 매니큐어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엄지발톱은 지금도 울퉁불퉁하다. 스트레스로 인해 그렇게 되었을 거라고 했다. 아마도 스트레스는 현재진행형인지 예쁘게 자라다가 굴곡이 생기는 부분이 또 나타난다. 게다가 엄지발톱은 발가락 피부에서 좀 들려있다. 엄지발가락의 발톱이 살짝 떠있는 그 부분은 하얘 보여서 발톱 색깔이 균일하지 않다. 새끼발톱은 아예 변형돼서 앞으로도 예쁜 발톱을 기대하긴 힘들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날엔 너무나 속상했다. 지금은 일부러 245mm 사이즈의 조금 넉넉한 신발을 신는 편인데도, 새끼발가락 바깥쪽에는 가끔씩 티눈이 생겨 아프고 보기에도 좋지 않다. 발레리나도 아닌데 상하고 험한 발을 볼 때면 내가 너무 무심했나, 너무 발을 혹사 시켰나 싶다가도 내가 특별히 발에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아 서운한 마음까지 들곤 한다. 발에 대한 주제로 누군가와 이야기해 본 적이 없어서 누군가로 인해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기회도 없었다. 누군가가 '내 발은 더해'라든가, '내 발도 이래'라고 보여주었다면 좀 괜찮은 기분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발에 대해서 말 꺼내기도 내키지 않았던 내가 발을 서로 보여주는 일을 달가워했을 리 만무하다.
열등감이란 이런 것이다. 누군가에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작은 부분을 꽁꽁 싸매어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비밀로 만들어버릴 때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리는 것이 열등감이다. 이 글을 쓰면서 점점 마음이 편해졌다. 양쪽에서 세게 당겨 팽팽하게 긴장된 고무줄을 놓았을 때, 바닥에 떨어진 그 고무줄이 사실은 아주 짧고 작은 고무줄이란 걸 알았을 때의 허망함이랄까, 아니면 시원함이랄까. 이 글을 통해 나는 그동안 나에게 꽤 중요했던 당겨진 고무줄 하나를 놓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어쨌든, 나는 축축하지 않고 보송한 글을 쓰고 싶다. 시각과 청각이 고요함의 담요를 덮는 밤 시간에 글을 쓰는 걸 좋아해서 때로는 감성에 젖은 글들이 물기가 너무 많이 머금은 듯 느껴질 때도 있었다. 밤에만 글을 쓰지 말고 낮에도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글 쓰는 일이 빨래 너는 일이 아닐 테고, 글이 햇볕에 마를 리도 없겠지만, 낮에 글을 쓰면 왠지 문장이 더 밝고 맑아질 것 같다. 그리고 더 솔직해질 것 같다. 감상을 배제한 팩트로만.
글을 쓰는 일은 때로 내 기분의 눈치를 보는 일이다. 특히 밀린 글들을 쓸 때에 그러한데, 당시에 썼으면 좀 더 미끈하고 예뻤을 글들을 다 지난 감상으로 쓰려 하면 그처럼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없다. 그래도 조금씩 마음을 구슬려본다. '그때 좋았잖아. 그때 기억나지? 맞아, 그때 내가 그런 생각을 했던 거 아직 잊지 않았구나!'하면서 기분을 다독여서 며칠 혹은 몇 주 전의 쓸 거리들로 안내해야 한다. 오늘도 슬슬 기분 달래며 밀린 글감을 바라본다.
그나저나, 아, 오늘은 너무 더워.
이런 날엔 망설일 것도 없이 씹어 물면 즙이 시원하게 입속으로 퍼지는 아삭 수박이다! 그럼 이만, 총총거리며 수박 먹으러 가요. 열등감에 대해 드디어 글을 쓴 이 즐거운 날에, 도망가는 건지, 자유해진 건지 알 수 없는 마음으로 급히 글을 마무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