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트너 부부의 여행>
지뷜레 펜트 저
클
내 곁에 있어줘
내 곁에 있어줘
내 곁에 있어줘
해 질 녘이었다. 해는 기울어 가고, 주홍빛 어스름한 빛이 여의도공원을 비추었다. 너무 캄캄해지지 않은 시각에 운동하는 게 좋아서 가능하면 매일 그 즈음에 걷곤 했다. 빠르게 걷는 내 앞에는 백발의 노부부가 걷고 있었다. 손을 잡고 느리게 걷는 그 두 사람의 뒷모습이 점점 가까워졌다. 이어폰을 꽂은 채 라디오를 듣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지만, 그들 사이에 흘렀던 따뜻함과 평화로움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은 사진을 찍어둔 듯 내 머릿속에 저장되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는 상투적인 말로는 부족한, 감동을 주는 뒷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아름다워 보였는지 모르겠다. 공원을 매일 걸으며 수많은 연인들을 보아왔지만 감동을 받은 적은 없었다. 연인들의 모습은 내가 걷는 길의 배경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노부부는 그날 내가 걷던 길의 주인공이었다. '마지막까지 저렇게 살고 싶다'라는 강렬한 소망이 내 안에서 꿈틀거렸다.
며칠 전에 "관계에 있어서 가장 큰 소망이 무어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 떠오른 이미지는 해 질 녘의 노부부의 뒷모습이었다. 나는 "남편과 내가 백발의 노인이 되었을 때, 함께 손을 잡고 느리게 걷는 뒷모습을 꿈꾼다"라고 대답했다. 젊은 시절의 열정적이고 격렬하며 그 어떤 장애도 두렵지 않은 사랑보다, 아주 오랜 시간 서로의 모든 것을 경험하고도 남아있는 은근하고 용납해주는 사랑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겪어보지 않았지만, 네가 어떤 모습이어도 다 괜찮아'라고 말하는 '가정(假定)의 사랑'보다, '예상치도 못했던 당신의 나약함과 실수도 보았고 때론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참 좋아'라고 말하는 '실제 견디어낸 사랑'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젊은 날의 사랑보다 나이들 때까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사랑의 뒷모습이 그렇게 좋았나 보다. 다 보아도, 다 알아도 괜찮은 사랑. 어떤 일을 겪고도 여전히 남아 있는 진짜 사랑.
치매에 걸린 엘케 게르트너 할머니와 남편 로타어 게르트너 할아버지의 마지막 여행의 흔적들을 따라간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르미타시에서 찍은 사진을 본다. 드레이프성이 풍성한 하얀 커튼 앞에 선 창가의 백발의 노부부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눈빛과 미소, 아내의 얼굴에 닿은 남편의 손길, 남편의 허리에 가볍게 얹은 아내의 손을 본다. 좁은 두 개의 침대 위로 번진 두 개의 노란 조명이 노부부의 얼굴을 어루만질 때, 곤히 잠든 남편과 아직 잠들지 않은 아내의 주름진 눈가를 본다. 남편이 옷을 갈아입힐 때 아이같이 순진한 얼굴로 맑게 웃는 아내의 웃음을 본다. 그러다 문득 또렷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는 아내를 보며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나를 기억해줘. 내 곁에서 끝까지 나를 사랑한 이 사람을 기억해줘.'
결국 사진은 떠나는 자가 아니라, 남을 자를 위한 것이다.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그 사람을 추억할 남은 자에게 사진이 필요하다. 흐릿해지는 기억을 잡고 싶을 때, 그 기억의 한 장면을 일깨우고 그 순간으로 잠시라도 다시 돌아가기 위해 사진이 필요하다. 그러니 사진은 사랑이다. 그 사람이 떠나도 나는 그를 곁에 두고 기억하고 싶은 절실한 마음이 사진으로 남는다.
나의 아버지가 그랬듯, 나도 사진 찍는 일을 좋아한다. 어린 시절 사진 찍히지 않겠다고 도망가고, 그마저도 실패하면 사진 앞에서 무표정으로 일관해 아버지를 실망시키던 내가, 수시로 내 아이들을 카메라 뷰 파인더로 보는 엄마가 되었다. 어떤 날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다가, 갑자기 아빠 생각이 나서 울컥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뷰 파인더로 보았을 내가, 아버지에겐 모든 걸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의 대상이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에 아버지는 곁에 계시지 않았다. 시간은 그렇게 엇갈린다. 때론 눈물 나도록 아프게.
오늘 해 질 녘에, 우리 가족 네 사람이 함께 좋아하는 곳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려 걷는데, 햇살이 부챗살처럼 펼쳐지는 모습이 아름다워 가만히 그 자리에 섰다.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을 사진 안에 들여놓아야 한다는 강박은 사라졌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사진이지만, 그 사진 속에 우리 네 사람이 있다는 걸 이젠 안다. 언젠가 이 사진을 다시 본다면, 나는 저편에서 환하게 흩어지던 햇살을 기억하며 내 곁에서 내가 사진 찍기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주던 나의 가족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 사진 속에 우리의 모습은 없지만, 우리 모두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 어릴 적 사진들이 필름처럼 지나간다. 덩그러니 나만 남아있는 사진 속엔 나 말고도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있다. 나를 찍은 아빠, 그 곁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엄마. 그 사진들은 모두 아빠를 담고 있었다. 카메라 뒤의 아빠를.
<게르트너 부부의 여행> 사진집을 덮으며, 나는 그들을 기억하는 또 한 사람이 되었다. "내 곁에 있어줘."라고 적은 그녀의 글은 이제 나에게 "나를 기억해줘."라고 읽힌다. "내 곁에 있어줘. 그리고 나를 기억해줘." 이 두 문장은 내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고 싶을 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