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 공부>
핼 스테빈스 저
윌북
'독창성'이란 뭐 대단한 게 아니다.
그냥 보고, 듣고, 읽고, 기억한 것에
'나 자신'을 더하면 된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이 책을 들고 나가서 오늘 하루 종일 틈틈이 읽었다. 여유롭게 책을 읽을 짬이 나지 않았던 하루였다. 이 책은 카피에 관한 1060개의 문구를 나열한 책이라 잠깐 한 문장을 읽고 책을 덮어도 흐름이 끊기지 않아 좋았다. 한손에 들어오는 책 크기니 들고 다니기 좋았고, 제목에 '공부'라는 단어가 있어 뭔가 배우는 중이라는 뿌듯함도 있었다. 술술 읽히지만 콕콕 박히는 문구들이 줄줄 이어졌다.
종일 단어들이 위로 솟는 분수 위에서 통통거리고 깔깔대는 것 같았다. 선글라스를 쓴 작은 단어들이 파도를 타다가 물방울처럼 튀어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내 머릿속이 단어들의 놀이터가 된 기분이랄까. 날파리처럼 눈앞을 날아다니는 단어들을 골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짝지어주며 나도 같이 놀았다. '신선한 카피를 위해 단어의 낯선 조합을 하라'는 이유미 작가의 글도, '창의성은 낯선 것들의 연결'이라던 고영성 작가의 글도 떠올랐다. 결국 같은 얘기다. '독창적'이려면, 이미 있는 것에 '나'를 더하라는 거다. 나의 생각, 나의 경험, 나의 감정, 나의 취향, 나의 직감 등등. 내가 낯선 단어들의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다.
아이들 하교 시간에 맞춰 조금 먼저 집에 들어왔다. 소파에 누워 10여분간 혼자만의 달달한 독서타임을 누렸다. 곧 집안의 모든 고요를 한번에 날려버리는 아이들의 말소리와 발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배 깍아주세요!" 아이들은 냉장고의 수박이 다 떨어진 걸 딱 기억하고 바로 '배'로 갈아탔다. 배를 깍으러 갈 시간을 벌어보려고 "냉장고에서 배좀 꺼내놔줄래?"라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러곤 여전히 소파에 누워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며 몇 문장 더 읽어내려갔다. 냉장고 가장 높은 칸에 배가 있어서 임이가 까치발을 하고 그걸 꺼내려고 애를 썼다. 봉투째로 끌어내 배를 꺼낸 후 철사끈으로 다시 묶으면 되는데, 그게 귀찮아서 두 손 높이 들어 철사끈으로 봉투를 여미느라 분투중이었다. 조금 후에 슬이가 화장실에서 "나도 배!"했다. 그래서 내가 배를 하나 더 꺼내어 주겠냐고 임이에게 말했더니 깜찍한 그녀가 하는 말,
"아~ 정말. 발만 낭비했어!"
이 말의 의미는 처음부터 두 개를 꺼내면 까치발하는 행동을 한번만 하면 되는데, 그 일을 두번이나 하게 되어 발이 고생이라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누워서 <카피 공부>책을 읽던 나는 딸의 그 말이 너무 신선해서 벌떡 일어났다. 배를 깍아주며 그 문장을 언젠가 글쓸 때 사용해야겠다는 생각했다.
발만 낭비했어
발걸음만 낭비했어
감기 때문에 콧물만 낭비했어
내 마음만 낭비했어
(이렇게 앞부분만 바꾸며 무한 확장 가능)
오호! 단어들의 근사한 조합이라며 혼자 매우 신났다. 그리고 우리딸 창의성이 보통이 아니라며 기뻐했다. 카피는 이렇게 애브리웨어 애브리타임 팡팡 터지는거였구나. 소설을 쓸 것도 아닌데 상상 속 남자를 묘사해보고, 상품을 홍보할 것도 아닌데 카피 문구로 좋겠다며 또 낯선 단어들끼리 매칭시킨다. 시도때도 없이.
어쨋든, 카피 공부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