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킬로그램의 삶>
박선아 저
어라운드
<<AROUND>> 매거진에서 '주름진 것들'에 대한 그녀의 글을 읽고 구입했던 책이다. 담담한 듯 촉촉한 글의 결이 좋았다. 이 책은 표지 사진부터 아주 오래된 어느 시절로 훌쩍 돌아가게 해 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야간이면 후레쉬를 터뜨리며 인물사진을 촬영했던 필름 카메라 시절이 있었다. 내 20대의 사진도 그랬다. 지금 나는 플래시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어두우면 어두운 느낌 그대로 살려 사진을 찍거나 광량이 너무 부족할 때에는 빛이 조금 있는 곳으로 나를 옮긴다. 사람이 시커멓게 나와도 괜찮고, 촛불 앞에 선 사람의 얼굴이 전부 나오지 않고 입술과 코, 눈빛만 밝혀도 좋다. 인물이 아닌 분위기를 찍는 거다. 어쩌면 10여 년 전의 나는 분위기나 기분대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그 사람의 날 것 그대로의 표정과 상황을 찍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그때의 사진을 생각해보면 갓 잡아올린 생선이 비늘과 눈을 번뜩이며 온몸을 흔들어대듯 생기가 있다.
이 책에 실린 그녀의 글은 생각보다 쉽게 읽혔다. 최근의 매거진에서 보았던 그녀의 글에서는 곱씹으며 그 단맛을 느꼈다면, 이 책 속에 실린 글들은 소소하고 수수했다. 생긋한 젊음까지 느껴졌다. 여름 햇볕 아래 등을 타고 흐르는 땀에서 느끼는 젊음같이. 커다란 챙이 달린 모자도 쓰지 않고, 양산을 쓰지도 않으며, 그 흔한 선크림도 바르지 않고 태양을 바라보는 젊은 기운이 느껴졌다. 뜨거운 여름 날 서울의 미술관 중에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자하미술관에 가보고 싶어졌다. 어린 시절 태양과 눈싸움을 하겠다며 겁도 없이 태양을 바라봤던 그 뜨거운 마음으로 태양에 가까운 그곳에 오르고 싶었다.
친구는 가끔 도서관 책에
쪽지나 일기 한 페이지를 숨겨놓는다고 했다.
책은 훼손되지 않지만,
누군가 책 안에서
뜻밖의 선물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면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책에 연필로 줄을 긋거나 형광펜으로 한눈에 문장이 들어오도록 칠을 하는 일을 멈췄다. 이사할 때마다 책장 밖으로 넘쳐나있는 책들을 정리할 때 늘 그런 책이 문제였다. 더 이상 읽을 것 같지 않은 유행 타는 책들에 줄이 그어져 있으면 중고로 내다 팔 수도 없어 버렸다. 깔끔한 프랜차이즈 중고서점에서 줄을 그은 책을 사지 않는 것이 좀 야속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그걸 다 골라 헌책방 골목을 갈 시간과 마음의 여유도 없을 때였다. 그때 마음먹은 게 무조건 책에는 포스트잇으로 표시를 한 후 독서노트에 기록하고 줄을 긋지 않는 것이다. 어떨 때에는 시원스럽게 줄을 쫘악 그어가며 내 흔적을 남기고 싶고, 메모도 하고 싶은데 다 읽고 나서 변심하여 이 책을 집에서 내보내고 싶어질까 봐 마음 편히 그러지도 못한다. 집 크기는 한계가 있고 책장도 무한정 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지금은 구석에서 책나무로 쌓는 방법을 택해서 일단은 책들을 높이높이 쌓아가고 있지만, 몇 달에 한 번씩은 저 책나무 중에 다시는 읽지 않을 것 같은 책들을 또 추려내야 한다. (물론 안읽을 것 같아 처분하고 언젠가는 다시 찾는 책도 분명 있다. 알 수 없다, 사람 마음은.)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연필을 들고 싶어졌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는데, 연필로 줄이 그어져 있고 이런저런 메모가 있는 걸 보고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오래된 책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취를 남긴 그 책이 꼭 보물처럼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미 메모가 되어 있는 책이 도서관에 기증된 것인지, 아니면 도서관 책에 누군가 흔적을 남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엄연한 비도덕적 행위라는 생각보다는 그저 낭만적이고도 감상적으로만 기억된다.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를 따라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집에 있는 고전문학이나 오래 두고 보기 좋은 책에 메모를 적은 종이를 꽂아두면 어떨까. 그 책을 읽은 감상과 그다음에 연결해서 보면 좋은 책이 무엇인지를 슬쩍 귀띔해주는 정도로. 우리 아이들이 혹은 다른 누군가가 먼 훗날 그 메시지를 본다면?! 생각만 해도 짜릿하게 기분이 좋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사진집을 들춰보다가 어떤 페이지에 꽂혀있는 노란 메모지를 한 장 발견했다. 반듯하게 접혀있었을 그 메모지는 책 사이에서 다림질한 듯 펴져 있었다. "하루에 한 번쯤은 하늘을 바라보세요!"라는 귀여운 필체의 한 문장과 함께 눈웃음이 사랑스러운 구름 뒤로 빼꼼히 모습을 드러내는 해님의 모습도 그려져 있었다. 나를 생각하며 쓴 글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나를 위해 쓴 글처럼 읽었다. 나도 한 사람을 생각하며 쓴 글을 책 사이에 꽂아두고 싶다. 그리고 누구라도 그걸 발견하면 그 한 사람처럼 행복한 미소를 지은 채 책을 덮게 된다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