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매혈기>
위화 저
푸른숲
블랙코미디.
시커먼 피가 눈앞의 하얀 천자락을 서서히 물들이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괜찮아, 나는'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허삼관의 시선을 느꼈다. 아니, 당신 괜찮지 않아. 절. 대. 로.
쉽게 읽히는 책이다. 하지만 결코 쉽게 덮을 수 없는 책이다. '허삼관'이라는 한 사람의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야기 흐름을 관통하는 건 '매혈'이다. 자신을 위해서는 한 번도 피를 팔아보지 않은 한 남자는 평생 가족을 위해 피를 팔았다. 젊을 때는 그저 매혈이 '몸이 건강하다는 증거'였기에 심심풀이처럼 팔았다. 피야 뭐, 다시 만들어지는 거 아닌가. 급전이 필요할 때는 35원이라는 돈이 순식간에 손바닥 위로 떨어지기에 그만한 돈벌이도 없었을게다. 건강하다는 증거도 되고, 돈도 생기고, 돼지간볶음과 황주까지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일석삼조 아닌가. 피는 곧 힘이요, 돈이었다. 그에게 피를 팔 수 있다는 건 자신이 누리는 축복이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이 책 속 인물들의 삶은 하나같이 참담하다. 허삼관, 아내 허옥란, 일락, 이락, 삼락이도, 하소용도, 그의 아내도 그 누구 하나 상처입지 않은 영혼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가시가 되기보다 닳고 문드러진 스펀지가 되기로 했다. 9년을 키운 아들이 남의 아들이라는 짐작을 확신으로 가진 후에도 허삼관은 그 아들을 품었고, 끝내 친아들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하소용을 살리기 위해 일락이는 그를 아버지라 불렀으며, 가슴의 목판에 '기생 허옥란'이라고 써놓고 비판투쟁대회에서 근거 없는 모욕을 당해도 허옥란은 묵묵히 견디어냈다. 그들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으나, 그 감정 속에 매몰되지 않았다. 감정에 매몰될 수 있음도 어쩌면 마음이 누리는 사치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에겐 감정을 붙들고 흔들어댈 여력도 없었다. 견뎌내야 할 삶이 코앞이었다. 그리하여 그 감정들은 무거운 돌덩이였다가 잘게 쪼개지더니 이내 모든 내적 에너지를 잃고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졌다. 대머리처럼 남아버린 하얀 심만 가슴에 박아놓은 채.
이 요리는 삼락이한테만 주는 거야.
삼락이만 침 삼키는 걸 허락하겠어.
만약 다른 사람이 침을 삼키면
그건 삼락이의 홍사오러우를
훔쳐먹는 거라구.
가뭄이 들어 수개월간 옥수수죽에 물 타먹기로 연명하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자, 아버지 허삼관이 가족들을 앞에 두고 '말로' 음식을 만들고 각 사람에게 먹도록 준다. 다른 사람은 침을 삼키지도 못하게 하는 허삼관의 말에 눈물과 웃음이 함께 터졌다. 작가 위화의 글 사용이 이러하니, 말할 수없이 슬픈 상황인데도 웃음이 났다. 내 감정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그래서 더 아프고 가슴이 턱 막힌 것처럼 그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아버지가 식도를 코팅하며 조심스럽게 넘어가는 우유 같은 이야기를 지어냈다면, 허삼관은 매실을 탄 탄산수처럼 단맛도 나면서 식도를 사정없이 자극하는 이야기를 했다. 허삼관이 사는 법은 그랬다. 그에게 다가가는 고난들은 이런 방법으로 그를 통과했다. 그는 지나치게 심각하지 않았고, 조심스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독자인 내가 소리를 치고 싶게 만들었다. 그 속이 허물어져내리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겉으로는 허허허 웃어넘기는 그 얼굴로 인해 내가 괴로웠다.
일락아,
오늘 내가 한 말 꼭 기억해둬라.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한다.
난 나중에 네가 나한테 뭘 해줄 거란 기대 안 한다.
...
내가 늙어 죽을 때,
그저 널 키운 걸 생각해서
가슴이 좀 북받치고,
눈물 몇 방울 흘려주면
난 그걸로 만족한다.
아버지의 마음.
늙어죽을 때, 자기를 키운 걸 생각해 가슴 좀 북받치고 눈물 몇 방울 흘려줄 그 아들을 위해 그는 목숨을 잃는다 해도 피를 팔 거라며 죽음을 각오하고 피를 뽑았다. '돈이 열리던 나무'는 이제 제 가지도 가누지 못하고 파르르르 떠는 말라비틀어진 고목이 되어갔다. 그러나 그는 피를 뽑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피를 묽게 해 더 많은 양의 피를 뽑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여덟 사발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이 더이상 들어가지 않을 것 같으면 소금을 입에 털어놓고 오줌보가 터지도록 물을 몸에 채웠다. 이토록 몸을 혹사시켰음에도 그는 질긴 삶을 죽음이 아닌 살아있음으로 매일 맞이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었다. '가진 게 몸뿐'이었던 한 사람이, 이제 '가진 게 돈뿐'이 되었을 때 그의 눈앞에 펼쳐진 돼지간볶음 한 접시와 황주는 그의 고달픈 삶의 유일한 위로였으리라. 피를 뽑은 후 홀로 먹었던 그 돼지간볶음 한 접시와 따뜻하게 덥힌 황주, 그저 그것이 그의 최고의 위안이라는 슬픔. 피를 팔아 살려다 피를 팔아 죽게 된 사람들 속에, 피를 팔고도 살아남아 더 이상 피를 팔 수 없는 자신의 삶을 물에 젖은 눈망울로 멍하게 바라보는 한 사람의 이야기, <허삼관 매혈기>.
+
아버지,
아버지는 살아계실 적,
제가 모르는 얼마나 많은 일들을 감당하셨나요.
'헌신'이라는 이름의 사랑을
알고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모르고도 뻔뻔하고 무심하게 제 갈 길로 달려갔던
제 모습이 보여요.
아버지,
아버지로 인해 제가 지금까지 있어요.
아빠,
사랑해요.
-이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다운 곳에서
이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실 아빠께,
하나뿐인,
당신의 목숨처럼 소중했던 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