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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anna Kwon Nov 09. 2018

장욱진미술관에서, 숲 속을 거닐다

   4년 전 한여름, 장욱진미술관 개관전을 관람하기 위해 장흥으로 향했다. 온통 새하얀 색으로 뒤덮인 미술관 건물은 초록빛 싱그러운 산 아래에서 온몸으로 뜨거운 여름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당시 일곱 살이던 두 딸들이 더 좋아할 전시라고 확신하며 함께 갔던 장욱진미술관에서 내 마음은 어린 아이처럼 맑음으로 물들었고, 순백의 고요로 충만했다. 미술관에서 나와, 우리는 근처 조각공원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장욱진 화백의 작품이 담긴 도록을 보며 그의 그림체를 닮은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을 바라보았고, 개울에서 물방울을 튀기며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장욱진미술관의 기억은 내게 쉼과 자유였다.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저 받아주기만 할 것 같은 하얀빛의 ‘쉼’, 그리고 모든 여백에 내 마음대로 상상의 그림을 그려도 될 것 같은 ‘자유로움’. 




   이번엔 가을이다. 나뭇잎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색들이 피어난 가을에 나는 다시 새하얀 미술관을 찾았다. 미술관 정류장에는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비가 오더라도 걱정 없을 커다란 하얀 우산을 든 하얀 사람의 조형물이 가을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다. 미술관과 분리되어 있던 조각공원은 어느새 장욱진미술관 뜰의 일부가 되어 있었고 조각공원으로 입장을 하도록 바뀌었다. 조각공원 곳곳엔 바삭한 가을의 컬러가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심플하다


   화가 장욱진(1917-1990)은 한국의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신사실파’의 주요인물로서, 사물을 재현하는 것보다 그 내면의 순수한 본질을 나타내는 일을 추구하였다. 그는 나무, 새 등의 자연과 아이, 가족 등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장욱진 화백이 수없이 외쳤다는 “나는 심플하다”는 말처럼, 그의 삶과 작품도 그러했다. 그는 이전의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길을 가기를 거부하고 혼자서 사색하고 타인이 가본 적 없는 길을 혼자서 개척했다. 우리나라가 격동의 시기를 견뎌내야 했던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지만, 그는 세상의 어두움에 눌리지 않고 누구보다 밝고 맑고 순수한 그림을 그렸다. 여리거나 억눌리지 않은 강건한 이미지를 그려냈다. 



장욱진 <아이>

   <아이>라는 작품 앞에 섰다. 머리는 위가 뚫린 밥그릇 형상으로 반쯤 그려 놓았고, 사람임을 나타내는 몸통과 사지는 몇 개의 선으로 간단히 그려져 있다. 손가락은 길에서 주운 나뭇가지 같이 두 가닥 뿐이다. 누구나 그릴 수 있을 듯한 사람 모양의 그림 앞에서 나는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머리의 윗부분이 막히지 않게 그린 것은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생각을 표현한 것으로 느껴졌고, 앙상해 보이지만 꽤 단단해 보이는 몸통과 사지의 선은 겉치레나 치장 따위가 없어도 흡족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으나,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아이의 모습이었다. 그림의 아이를 바라보던 나는 거울상의 그 아이가 되었다. 닫힌 생각들이 열리고 나를 둘러싼 무거운 짐들이 눈 녹듯이 사라져버리는 느낌이었다. 아이의 동그란 눈은 나를 응시하고 있었고, 살짝 미소 지은 그 입술은 나에게 “단순하게 살아”라고 말하고 있었다. 심플하게 살고 싶어졌다. 장욱진의 <아이>처럼. 



여기, 여기, 여기 (“Here, Here, Here”)


장욱진 <까치>


   장욱진 화백이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건 ‘까치’그림 때문이었다. 미술대회에서 까치 그림을 그린 것을 계기로 화가의 길로 들어섰으니 말이다. 누군가가 그에게 “무엇을 하는 사람이오?”라고 물었을 때 그는 “까치 그리는 사람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을 사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현재 무언가에 몰두해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부르는 사람이었다. 그의 까치 그림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전엔 본 적 없는 까치의 그림이었다. 까치 그리는 일에 몰두했던 장욱진 화백의 독특한 까치 그림 한 점을 나는 이번 전시의 최고 마스터피스로 꼽았다.



장욱진 <가족>


   전시장 가운데 전시되어 있던 앨범 속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장욱진 화백의 가족  사진이었다. 오래되어 빛바랜 사진들을 보면서 그 사진들이 나의 가족사진과도 참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사진 속 얼굴들은 다르지만, 그 사진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동일했다. ‘사랑한다, 우리는 네 편이다.’ <가족>이라는 작품 속 초록 동그라미 안에 서 있는 네 사람은 비좁은 공간 안에서도 단란해보였다. 손잡고 있지 않아도 하나로 보였다. 요란하지 않은 사랑이었다. 침묵이어도 느껴지는 사랑이었다. 그것이 장욱진 화백이 표현하고 싶었던 가족에 대한 사랑이었으리라.   




선생님그림은 어디서 그리세요?” “여기.”

선생님식사는 어디서 하세요?” “여기.”

선생님 잠은 어디서 주무세요?” “여기.”


   나의 ‘여기’는 어디일까?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여기’는 어디일까.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저기’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도 목마른 사람이다. 내 삶이 더 특별한 ‘여기’를 찾기 위해 방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내 발을 딛고 서 있는 ‘여기’가 내가 그렇게 소망하던 행복의 자리임을 깨닫는 게 지혜다. 만족을 모르면 앞으로야 나아가겠지만, 그 사람에게 ‘여기’는 ‘저기’를 가기 위한 경로일 뿐이니 ‘여기’에서 누릴 수 있는 수많은 기쁨들은 온전히 그의 것일 수 없다. 장욱진 화백의 제자 최종태 작가는 <장욱진, 나는 심플하다>라는 책에 이렇게 썼다. ‘깨끗하여라. 정성을 다하여라. 한 우물을 파라. 멀리 보라. 용감하여라. 서두르지 마라. 말씀으로는 안 했지만 나는 스승의 삶 속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 ’저기‘로 옮기느라 ’여기‘에서 내가 살아내야 할 삶을 미처 살아내지도 못하는 인생으로 끝나지 않도록. 




숲 속, 그림 같은 미술관



   미술관 카페에 앉아 장욱진미술관의 하얀 계단 사진이 표지로 담긴 이은화 작가의 <숲으로 간 미술관> 책을 가방에서 꺼냈다. 책에는 우리나라의 숲 속 미술관들이 소개되어 있다. 이미 가본 곳도 꽤 있었고 꼭 가보리라 마음먹었던 곳도 있었다. 이름도 들어보지도 못했던 미술관을 책을 통해 알게 되는 건 보물을 건지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아름다운 숲 속에 있는 그림 같은 장욱진미술관에서, 또 다른 숲속의 미술관을 여행했다. 눈과 마음이 시원해지는 자연 속으로. 자연의 품안에 있으면 안락함을 느끼게 된다. 그 감정은 어쩌면 내가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의 겸허함인지도 모른다. 자연 속에 있으면 복잡한 문제들의 소음이 잠잠해지는 것 같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내가 자연을 찾는 것도 어쩌면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어찌해보려고 발버둥 치던 온몸의 힘을 빼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미술관을 나와 계단을 내려가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거대한 하얀 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단순하게 생각해. 다시 그 자리에서 내 삶을 살아내는 거야.” 높고 파란 가을 하늘 아래, 아직은 푸른빛을 머금은 숲 아래, 하얀색으로 몸을 부풀린 커다란 집이 있다. 그리고 그 아래 내가 있다. 큰바위 얼굴을 바라보는 어니스트처럼, 하얀색으로 물든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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