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anna Kwon Nov 02. 2018

JJ중정갤러리에서, 고요한 빛을 누리다

  경복궁역 버스정류장에서 1711번 버스로 갈아탔다. 차창 밖으로 흘러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도심의 높은 건물들은 사라지고 아담한 건물들이 눈앞을 스쳤다. 하늘은 더 아래까지 내려와 있는 것 같았고, 나무는 고개를 더 길게 위로 내민 듯 보였다. 자연이 우위에 있는 풍경 속에서 달리니 청량감이 듬뿍 느껴졌다. 자가용을 운전하며 목적지를 향해 갈 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버스 안에서는 보였다. 앞을 보지 않고 옆만 바라보며 갈 수 있는 특권을 마음껏 누렸다. 


   아홉 개의 정류소가 지나고 평창동 주민센터 앞에서 하차했다. 낯선 곳에 내렸을 때의 기분 좋은 설렘으로 충만해졌다. 방향성조차 없어 핸드폰의 지도 앱을 켜지 않으면 어디로 가야 할지 도통 알 수 없는 막연함도 좋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스마트폰 앱이 알려주는 쪽으로 나의 몸의 방향을 조정하는 일, 그리고 발을 내딛는 일이 전부였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오래 내쉬면서 천천히 걸었다. 어느덧 하이힐을 신었더라면 차라리 오르기 편할 것 같은 가파른 경사의 오르막길 앞에 섰다. 눈을 드니 조용한 건물 하나가 우뚝 서있었다. 위로 치켜든 내 얼굴로 햇살이 지체 없이 쏟아졌다. 문득 새소리가 들렸다. 노래하듯 지저귀는 경쾌한 새소리. 여름 한철 울다가 사라지는 매미의 울음소리도 이 가을의 초입에 아직 선명했다. 




자연이 살아있는 그림이 되어 창문에 걸리다


   띵동! 벨을 누르니 안에서 누군가 달려와 문을 열어주었다. 문 사이로 나타나 나를 환대하는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에 가고 싶은 날이었어요.”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상황이 시끄럽고, 무엇보다 내 마음이 소란한 날엔 내가 선택한 자극 외에는 어떤 자극도 없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다. JJ중정갤러리는 그런 나를 위해 준비된 공간 같았다. 평일 오전이기에 방문객도 드물었고, 공간 자체가 주는 평온함이 그랬다. JJ중정갤러리는 2011년 강남구 청담동에서 설립되어 특색 있는 전시를 선보이고, 국내외 유수 아트페어에 참가하며 활발한 활동을 하던 갤러리로, 2017년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평창동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내가 매거진을 통해 이 갤러리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가고 싶다고, 아니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갤러리의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때문이었다. 자연 자체가 창문이라는 프레임을 입고 작품이 되어 걸린 것 같은 공간과 평창동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시원스러운 풍광의 매력은 한 컷의 이미지만으로도 반하기에 충분했다. 


유한함의 영원성(Eternity of Finiteness)



   1층에서는 <일상성의 양쪽>이라는 제목으로 이상권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고전적인 색채와 묘사를 통해 사실적으로 일상을 표현한 작품들이었다. 일상을 즐긴다기보다 일상을 살아내고 견디어내는 삶이 표현되어 있었다. 이상권 작가의 작품 속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너보다 더 힘들어.” 고단하고 남루한 삶에서 느껴지는 서글픔과, 다문 입술을 통해 드러나는 치열함, 치켜뜬 눈으로 뿜어져 나오는 분노와 공포, 그리고 슬픔의 감정들이 그의 그림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다만 그의 작품 앞에서 “그래요, 당신 많이 힘들었겠어요.”라고 위로를 건넬 수밖에. 그 앞에서 나의 고민은 작아지고, 사치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2층에 올라 만난 최영욱 작가의 작품을 난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갤러리 관람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 하나의 작품 앞에서 보냈다. 달항아리를 그린 그의 작품의 제목은 <Karma(카르마)>이다. 내가 움직이면 그 작품은 반응을 했다. 빛의 반사 위치가 변하고 달항아리는 입체로 살아났다. 뒤로 물러나며 볼수록 실제로 도자기가 벽 앞에 설치되어 있는 듯이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Karma>의 매력에서 나는 한참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시간은 멈춘 듯했고, 달항아리의 완벽하고 유연한 곡선은 내 마음의 모양이 되었다. 압도적으로 시선을 붙들어 다른 곳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멈추게 하는 힘을 느꼈다. 간결하고도 완벽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작품을 들여다보았다. 미세한 균열들이 가득하고 얼룩이 번져있었다. 최영욱 작가는 균열과 얼룩을 그리는 작가였다. 순간 인생을 생각했다. 수많은 균열과 얼룩이 있다고 해서 실패한 인생은 아니라는 것, 중요한 건 균열과 얼룩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삶에 스미면 더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최영욱의 달항아리 <카르마>



   3층에서 만난 황승우 작가의 작품 <세상의 모든 말(Every words you said)>는 마치 얇은 고무를 사각형으로 오려 쌓아 놓은 것 같았다. 사실 그것은 검은 화강암을 그라인더로 조각한 것이다. 황승우 작가는 생명력이 긴 화강암을 주재료로 선택하여 조각한다. 그라인더로 밀 수 있는 최대치는 ‘2mm’라고 한다. 그는 돌이 견딜 수 있는 강도의 최대치까지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상 얇아지면 사라지고 말아 더 이상 조각이 아니게 되는 ‘2mm의 두께’. 물성이 소멸되기 직전인 그 두께에 근접하여 작업하는 그의 작품은 말 그대로 과정으로서의 작품이었다. 그가 그라인더로 밀어 조각하는 그 순간들이 모두 한계에 대한 도전이고 그 시간 자체가 예술인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한계상황에 도달했을 때 기억하라며 해주었던 말이 기억났다. 절벽 앞에서 뛰어내려야만 자신이 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새의 이야기. 한계상황에서 믿고 전진해야만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의 작품은 켜켜이 쌓인 인생의 모든 순간들을 담아 놓은 것 같았다. 내가 경험하고 내가 선택한 모든 순간들을 통해 지금의 내가 되었음을 돌아보며, 후회 없다고 나 자신에게 말했다. 모든 것이 최선이었음을 믿는다고 고백했다.       


황승우  <세상의 모든 말들>


황승우  <Head>


현상을 통해 근원을 드러내는 빛



   갤러리에서 나와서 시인인 마크 스트랜드가 쓴 <빈방의 빛>이라는 책을 읽었다.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에 대해 쓴 글이 실려 있다. 나는 에드워드 호퍼를 ‘빛의 화가’라고 부른다. 빛을 잡고 싶어 한 화가, 빛을 퍼뜨리기보다 내면에 담고 싶어 한 화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정작 빛의 근원은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빛을 소망하고 빛으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빛을 누리는 사람들의 모습만 보여준다. <아침햇살>, <케이프코드의 아침>이라는 작품을 보며 보이지 않는다고 실존하지 않는 게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보이지 않는 빛을 누리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현존하는 빛의 근원을 느꼈다. 호퍼의 그림이 좋은 이유는 그림 밖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희망이기도 하고 위안이기도 하다. 그의 빛은 탈출구이고 숨 쉴 통로이며 구원의 소망이자 뜻밖의 선물이기도 하다. 



황승우 <메모리즈>


   갤러리에서 나의 질문에 친절하게 답변도 해주고 작품에 대해 설명도 해주던 큐레이터가 나에게 세 개의 질문을 던져주었다. 


   “저는 미술관에 가면 스스로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하며 작품을 봐요. 그렇게 하면 더 즐겁게 감상할 수 있고, 실제적으로 나와 관련된 작품으로 느껴져서 더 애정이 가죠. 첫째 질문은 ‘가장 좋았던 작품은 뭐야?’, 둘째는 ‘가장 별로였던 작품은 뭐야?’, 마지막으로는 ‘가장 사고 싶은 작품은?’이에요.”


   집으로 돌아오며 내내 어떤 작품을 사고 싶은지 결정하느라 즐거웠다. 그 작품을 살만한 비용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소장하여 내 것으로 삼고 싶은 작품에 대해 생각하는 건 심장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하나의 작품으로 생각이 수렴되었을 때 나는 그 작품을 내 마음의 벽에 걸었다. 빛이 아주 잘 들고 눈에 잘 띄는 곳에. 두고두고 기억할만한 좋은 작품을 마음에 걸게 되어 행복한 날이었다.




이전 03화 바우지움에서, 조각은 살아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