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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anna Kwon Oct 19. 2018

왈종미술관에서, 우리 화가들과 조우하다

   이번 제주여행 일정에 ‘왈종미술관’은 없었다. ‘왈종미술관’에 가보고 싶어진 것은 뜻밖에도 오설록티뮤지엄에서였다. 카페에 가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 커다란 벽에 걸린 그림 하나가 덜컥 내 마음에 떨어져버린 것이다. 베이지색의 바탕엔 커다란 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고 진분홍 꽃들이 만개해있었다. 꽃잎 하나하나가 톡톡 터질 듯, 가볍게 흩날릴 듯 설렜다. 그림 속엔 봄이 가득했고, 초록 지붕 아래에는 바다빛 저고리에 선명한 빨간색의 치마를 입은 아내가 정좌한 남편을 위해 차를 따르고 있었다. 마당엔 사슴 한 마리, 짝을 이루어 소곤거리는 듯한 새 두 마리, 장독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골프채, 그리고 빨간색 자동차가 있었다. 그 앞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그림은 숨을 쉬고 있었고,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 웃음소리가 났고, 바람소리,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렇게 이왈종 화백의 작품을 처음 대면했다. 그리고 ‘왈종미술관’에 어떻게든 가기 위해 스케줄을 변경했다.


차 한 잔의 따뜻한 여유, 왈종미술관


   왈종미술관은 정방폭포 근처에 있었다. 미술관 앞에 주차를 한 후, 배가 출출해서 미술관에 가기 전에 아트샵에 들러 음료와 스낵을 챙겨먹었다. 미술관보다 아트샵에 먼저 들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왈종미술관은 미술관으로 올라가기 전에 아트샵과 카페가 있어 작품을 감상하기도 전에 아트 상품들을 먼저 보게 되었다. 미술관에 다녀와서 표를 주면 음료와 아트상품을 할인가로 판매한다는 이야기는 먼저 들었어도 좋을 뻔 했다. 그래도 잠시 있다가 나올 미술관 관람이 아니니 몇 백 원 더 내고 시끄러운 뱃속을 조용히 해둔 건 잘한 일이었다. 조금 가파른 길을 따라올라 왈종미술관으로 들어갔다.




   이왈종 화백은 1945년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했다. 동양화를 공부하고 서울에서 20년간 교수생활을 하다가 1990년에 제주 서귀포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서귀포에 정착 후, 작업실을 갖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구상대로 건물모형을 만들었고, 스위스 건축가 David Maccuio와 한만원 건축 설계사를 만나 공동작업으로 왈종미술관을 건축하게 되었다. 왈종미술관은 그에겐 꿈에 그리던 그 공간이었다. 서귀포의 앞바다가 보이는 그의 작업실은 미술관 3층에, 1층엔 수장고와 미술교육실, 2층엔 전시공간을 두었고 옥상정원도 꾸몄다. 조선 백자같은 미술관 건물은 찻잔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감각도 물씬 풍기는 건축물이다. 이곳에서 이 화백은 제주의 자연과 일상의 모습을 밝고 따뜻하며 정감 어린 색채로 표현하였고, ‘제주생활의 중도’시리즈를 작업하였다. 갈등과 반복보다 평화와 여유가 있는 곳, 머물기에 좋은 이상향으로서의 제주를 표현했다. 




이야기가 들리는 평화로운 봄날 같이



   하얀색 벽에 걸린 그의 작품이 선명했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마주한 모빌처럼 마음이 흔들리고, 오색찬란하게 마음이 물들었다.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정지된 한 장면이 아니라, 움직이는 영상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차원적인 평면의 그림이 4D로 느껴진달까. 그의 그림은 내 상상력을 자극하고 내가 그림 속 공간으로 들어가게 해주었다. 소리가 들리고 냄새나 나는 것 같았다. 연분홍빛, 청록빛, 하늘빛 세상으로 첨벙 뛰어들어 아이처럼 그가 그린 세상에서 산책하듯 노닐었다. 그림 속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새 시간은 거꾸로 흘러, 나는 타임시프팅한 것처럼 그 배경빛깔이었던 어린 시절로 옮겨졌다. 가장 행복하고 소중하게 기억되는 그 빛깔의 그 순간으로. 이왈종 화백의 작품을 보면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감을 느꼈다. 바람도 급하게 불지 않고, 햇살도 너무 뜨겁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호의적이고, 저마다 행복으로 물들어있는 것 같았다. 그의 그림엔 마음의 여유와 시간의 여백이 있었다. 그는 사소하고 평범한 것을 감성적 동화처럼, 혹은 보는 이를 미소 짓게 하는 해학으로써 매력적으로 변환시켰다. 그의 그림에서는 훈풍이 불어오고, 그의 색채에서는 삶이 살만한 곳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힘이 발산되고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 하얀 구름과 닿아있는 흰 계단을 오르니 옥상정원이 펼쳐졌다. 하늘빛, 바다빛, 초록빛과 닿아있는 하얀 공간이 화안한 아이의 얼굴 같았다. 나무 조각상들이 있는 풍경은 그곳이 자연을 품고 싶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제주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람, 바람, 바람.... 바람 사이로 보이는 잔잔한 바다가 그의 그림과 닮아있었다.




꿈과 멋을 지닌 한국의 예술가들


   다시 아트샵에 들러 진열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이왈종 화백의 도록이 대부분이었고, 그중에 제목이 좋아 꺼내본 책이 바로 장준석 미술평론가의 <꿈과 멋을 지닌 한국의 예술가들>이라는 책이었다. 이왈종 화백에 대한 글도 있을 뿐 아니라, 내가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많은 한국의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대해 소개하고 있어서 구입했다.





이 책은 한 사람의 미술인이자 미술평론가로서 한국 화단의 최근의 열악한 상황을 감안하여 고육지책 가운데 하나로 구상하게 된 것이다.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작가들의 작업과 작품에 대해 이해시키고 그들의 삶이나 예술과 소통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싶었다.

-‘책머리에’ 중에서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우리나라 예술가들에게 얼마나 무관심했는지를 발뺌할 수도 없이 확연히 깨달았다. 이건 마치 얼마 전 헤어샵에서 매거진을 보다가 독일 유명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하는 한국의 작가에 대한 소개글을 볼 때의 민망함이었다. 나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작가가 세계적인 이란다. 내가 모든 작가를 알 수도 없고 한국작가라 해도 내가 모르는 게 사실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외국 작가들에게 더 관심이 있었던 내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은 확고한 공간이 생겼으니, 그것은 우리나라 예술가들에 대한 자부심이다. 한국적인 것을 찾고 나타내기 위해, 그리고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펼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한국의 자랑스러운 예술가들의 컬렉션이 이 책 안에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국내외 예술가들에 대한 중도(中道)에 조금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편협해지지 않는 길을 걷고 싶다,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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