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anna Kwon Dec 14. 2018

환기미술관에서, 그림에 시를 부치다

   개운한 마음이었다. 몇 개월간 준비해온 모든 것을 내어놓았고 이젠 결과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결과가 어떠하든 개의치 않는다는 듯 자유로운 마음으로 미술관으로 향했다. 스마트폰에 이어폰을 연결하고 뮤직 앱에서 마이클 부블레(Michael Buble)의 캐럴을 플레이했다. 한동안 마음을 한 곳에 쏟느라 세상이 무채색 같았는데 이어폰을 통해 경쾌한 캐럴이 흘러나오니 세상이 온통 빨강과 초록, 금빛으로 물든 것 같았다. 하얗게 소복이 쌓인 눈밭을 사정없이 뛰노는 강아지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리듬에 맞추어 고개를 끄덕이며 부암동으로 갔다. 



고요한 미술관, 그리운 그 자리에 서서


   알고도 갔다. 본관에서의 전시는 얼마 전 막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기미술관을 찾은 이유는 5년 전 본관의 옥상 바닥에 놓인 금빛 조형물에 비친 두 사람의 사진을 찍었던 기억 때문이었다. 뾰족구두를 신은 내 옆에서 까치발을 들고 엄마 흉내를 내는 딸의 귀여움이 가슴에 그리움으로 남은 그곳. 오늘은 혼자였고 그 조형물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날의 웃음소리는 귓가에 생생했다. 유난히 하늘이 파란 겨울날, 고개를 드는 것이 좋아 마냥 그러고 서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은 무엇이든 담을 것처럼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는 박충흠 작가의 커다란 조형물 아래에서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조형물의 패인 무늬를 따라 하늘빛이 번졌다. 하늘이 선이 되고 점이 되더니, 그 사이로 은빛 햇살이 가로질러 들어왔다. 눈이 부셔서 더 이상 볼 수 없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아무도 지나지 않는 계단에 앉아 김환기 화백의 <그림에 부치는 시>를 읽었다. 입김이 서리는 추운 겨울의 청량한 파란 하늘을 닮은 표지 그림에 마음을 빼앗겨 하늘을 보듯이 그림을 보았다. 




태양처럼 찬란한 마음을 가져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내 마음은 항상 뜨거운 것을 잃지 않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의 글을 읽으며, 오늘은 내 마음에 찬란한 빛보다 뜨거운 무언가를 담고 가고 싶어 졌다. 백자 항아리를 보며, ‘사람이 어떻게 흙에다가 체온을 넣었을까.’라고 생각한 그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손끝에 느껴지고 가슴에 닿는 온기를 더 먼저 느낀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눈부신 것보다, 따스함이 좋은 겨울, 환기미술관에 오길 참 잘했다. 항상 뜨거운 것을 잃지 않고 살았던 한 화가의 자취를 따라오길 잘했다.   



나의 은하수는 끝이 없어서


   별관에서는 2018 환기재단 선정작가인 나희균 작가의 <빛의 공간, 그리고 자연> 전시가 열려 있었다. 아무도 없는 별관 전시실에서 내 발걸음 소리만이 소음이 되는 고요한 관람을 했다. 



나희균, <나의 은하수1> 



밤하늘을 우러러보니 나의 미소함과 우주의 광대함에 숙연해집니다.

더구나 아름답게 빛나는 성운들과 미리내는 신비로움으로 가득합니다.

저 하늘의 별무리들은 우리에게 언제나 회심할 것을 권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희균의 작가노트 중


   <나의 은하수 1> 작품 앞에서 우주를 보듯 그림을 보았다. 수없이 쌓이고 퍼뜨려진 점들은 별이 되었고, 검푸른 빛 안쪽으로 보이는 보랏빛 광채는 우주의 심연으로 나를 초대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은하수를 바라보았다. 고등학생 시절, 과학잡지에 실린 우주 사진을 바라보며 느꼈던 경이로움과 전율이 다시 느껴졌다. 더 높고 더 넓고 더 밝은 것을 향하는 것은 본능이다. 그 본능을 따라가다 보면 더 낮고 더 작은 내 모습을 보게 된다.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함 앞에 선 사람은 높은 마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자신의 좁은 세계에서만 사는 사람은 결코 겸손함을 배울 수가 없다. 별들은 말하고 있었다. 점점 높아지는 마음의 고도를 낮추라고,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마음의 진짜 크기를 찾으라고. 



수향산방 가는 길(Way to the Suhyangsanbang)



   ‘수화’와 ‘향안’의 산방으로 향했다. 이번 <해와 달과 별들의 얘기 IV> 전시에서는 김환기 화백이 아내 김향안에게 보낸 편지그림과 일기, 드로잉, 유화, 과슈 등을 선보이고 있었다. 우주의 색채를 알고, 우주의 색채를 그린 화가 김환기 화백. 그가 그린 점과 선은 단순하지만, 신선하고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담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잃지 않았던 김환기, 김향안 부부의 기록들이 감동적이었다. 김환기 화백이 아내에게 “지금 NEWYORK은 바람이 불고 추워요. 그러나 봄이여요.”라고 쓴 편지글에 눈길이 멈추어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바람이 불고 추워도, 봄은 봄이다. 아무리 아프고 힘들고 슬프며 괴로워도, 봄은 봄이다. 가슴 시리게 흔들려도 내 인생의 봄은 여전히 봄이다. 봄이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추위가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다. 한 때의 찬바람에 봄을 잊지 않기를, 봄을 잃지 않기를, 그 자리에 있는 봄을 기억하고, 그럼에도 봄이기에 안심하기를. 봄이 시작될 때 거센 바람이 불어오고 꽃샘추위가 찾아오듯, 꽃피고 얼어있던 것들이 깨어나는 봄의 시작은 어쩌면 시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바람이 불고 추워도, 봄은 봄이다, 결국 봄이다. 



그, 단 한 사람



   미술관에서 나와 성북동의 작고 아름다운 서점으로 향했다. 비주얼도 알지 못하면서 꽤 비싼 ‘루돌프 핫초코’를 주문했다. 달달하고 따뜻한 음료로 목을 축여 속을 덥히고 싶은 마음이 급했다. 얼마 후 내 앞에 나타난 ‘루돌프 핫초코’는 하얀 마쉬멜로우에 프레첼을 뿔로 꽂은 루돌프 한 마리가 핫초코 안에서 느긋하게 누워있는 모습이었다. 깜짝 선물 같은 핫초코 한 잔에 미소가 번졌다. 읽다만 책을 다시 펼쳤다. 김환기 화백과 아내 김향안의 러브스토리를 담은 책이다. 이 책은 달달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숭고하고 강건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꿈을 꾸는 남자와 그 꿈 위에 남자가 서게 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의 헌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둘이 함께 성장하고 더불어 나아가는 삶의 여정의 기록이었다. 




출렁이는 두려움을

한 순간 잠들게 해주는 사람.


내가 가진 좋은 것을

세상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해 주고


나로 하여금 기꺼이 용기 내서

더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가게 해주는 사람.


때로는 입과 귀가 되어주고

때로는 세상을 만나는 통로가 되고

문이 되어주는 사람.


수화에게 향안은 그런 아내였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떠한 한 사람으로 남고 싶은지 생각했다. 가장 외로운 그 순간에 함께 해준 사람, 가장 기쁜 그 순간에 진심으로 함께 웃어준 사람, 말할 수도 없이 눈물만 쏟아지도록 슬픈 날에 눈이 벌겋게 되도록 함께 울어준 사람, 일어설 힘이 없을 때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빌려준 사람, 나아갈 길이 막막할 때 빛이 어디 있는지 가리켜주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다. 잊을 수 없는 ‘그 단 한 사람’으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다.





이전 08화 뮤지엄산에서, 미래의 건축을 만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