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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anna Kwon Dec 21. 2018

리움미술관에서, 안목에 대하여 생각하다

   물에 푹 적신 솜처럼 묵직해진 일상을 리셋하러 미술관으로 향했다. 오후 3시에 밭은걸음으로 걸었다. 4년 만에 다시 찾은 리움미술관은 세월의 흐름을 잊을 정도로 이전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삼성문화재단이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전하고 국내외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자 2004년에 지은 리움미술관은 수준 높은 우리나라의 예술품들을 소장하여 전시하고 있다. 고미술품이 특히 많이 전시되어 있으나 박물관이 아니라 미술관에 간다는 가벼운 느낌이 드는 것은 리움미술관의 전시가 역사보다는 예술 그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를 초월하고 동서를 초월한 예술 속에 잠기고 싶어 오늘은 리움미술관을 선택했다. 






그 합에는 매일 모란이 피었으리라


   Museum1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갔다. <시대교감>이라는 제목으로 상설전시가 열리는 Museum1은 고미술품을 주로 전시하고 있었다. 고려청자를 들여다보았다. 청자는 세계에서 중국와 한국 등 극소수의 나라에서만 제작되었던 특별한 자기라고 한다. 신비로운 비색 유약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고려청자 컬렉션들이 진열된 검은 방에 들어서니 수백 년 전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현실의 모든 소음과 배경으로부터 차단되어 오직 그 시대의 특별한 예술품들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청자의 색을 맛보았다. 곱고 부드럽되 결코 유약하지 않은 빛깔, 색 그 자체보다 자기의 형태를 살리는 빛깔, 초록도 아니고 에메랄드도 아니고 갈빛도 아니지만 그 모두 다이기도 한 오묘한 빛깔을 느꼈다. 청자는 튀듯이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고고하고 은은하게 존재감을 발하는 아름다움이었다. <청자투각 모란문 합> 앞에 섰다. 햇살이 좋은 날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오는 고려시대의 아침햇살을 상상했다. 합의 틈새로 비스듬히 빛이 들어가 내부에 모란꽃과 이파리의 그림자가 담겼을 것이다. 그 합 속에는 매일 빛을 머금은 모란꽃이 피었으리라. 


   분청사기와 백자에 다가갔다. <분청사기 귀얄문 태호>를 보았다. 거침없이 휘몰아치는 표면의 요철에 마음이 휘익 휩쓸리다가 항아리 내부를 엿보니 이내 태풍의 눈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고요를 느꼈다. ‘안녕하다, 안전하다’라고 내 마음에 말했다. 18세기에 제작된 <백자 호> 앞에 머물었다. 단순한 것이 좋다. 단순하되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 좋다. <백자 호>에는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사용의 흔적, 사람의 흔적, 기름을 머금은 흔적이었다. 연한 갈색으로 얼룩진 하얀 자기는 길고 긴 시간이 켜켜이 쌓인 듯 아름다웠다.




두 개의 촛불 앞에서


   Museum2로 들어갔다. 현대미술을 <동서교감>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하고 있었다. 동양과 서양의 현대미술들이 함께 전시된 공간에서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여러 문화 속의 다양한 가치들과 표현들을 만났다. 


   박수근의 <나무와 두 여인>. 박수근 그림의 거친 질감과 소박함이 좋다. 아기 업은 여인의 시선이 팔짱을 끼고 무언가를 머리에 이고 가는 여인의 뒷모습에 떨어지고 있었다. 어미가 된 딸을 바라보는 또 다른 어미의 시선처럼 애틋했다. 잰걸음으로 급히 떠나는 여인의 옆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기 업은 여인의 마음으로 그 마른 여인을 바라보았다. ‘니가 참 애쓴다, 니가 수고가 많다, 다녀오거라.’ 이젠 할미가 되어버린 한 여인의 딸을 향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거닐다 갑자기 내 눈 앞에 나타난 자코메티의 <거대한 여인III>를 올려다보았다. 결연하게 우뚝 선 여인이었다. 땅에 맞닿은 커다란 발을 보았다. 길게 늘어난 팔과 다리, 홀쭉한 배, 메마른 가슴 위로 보이는 가녀린 목을 타고 올라 비현실적으로 작은 머리를 보았다. 그 거대한 여인이 응시하고 있는 정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녀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을까. 거대한 여인처럼 나도 허리를 곧추세우고 서보았다. 자코메티의 손길로 태어난 그 여인은 영혼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렇게 연약한 몸으로 거대할 수 있는 것은 그 영혼 때문이리라. 거대한 몸에 파리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녀린 몸에도 강건한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우뚝 서서 살고 싶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두 개의 촛불>은 멀리서부터 나를 끌어당겼다. 이끌리듯 그 앞에 서서 두 개의 촛불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더 빛나는 촛불 하나와 어스름한 빛 속에서 아련하게 번지는 촛불 하나가 온기를 느끼게 해주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빛은 더 또렷하게 빛난다. 어렴풋하던 것이 또렷해진다. 주위의 공기와 희석되어 있던 것이 확연히 분리된다. 어둠은 빛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그 빛이 얼마나 강한지를 두드러지게 한다. 그것이 어둠의 힘이다. 삶의 어둑한 순간에야 비로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가치를 알아보는 눈, 안목에 대하여



   집에 돌아와 책을 폈다. 세계적인 미술품 감정사이자 프랑스 아작시오 미술관 관장인 필리프 코스타마냐가 지은 아름다운의 가치를 보는 안목에 대한 글이 담긴 책이다. 


진짜 같을 수는 있어도 진짜가 될 수는 없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

믿고 싶은 대로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깊이 보라.

아름다움은 준비된 사람 앞에만 드러난다.


   몇 번이고 되뇌고 싶은 문장들을 노트에 적어보았다. 흉내 내고 거짓으로 꾸며낸 것은 결국엔 가짜임이 드러난다. 가장 강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 단순한 모습으로도 가치를 발하는 것이다. 설명하거나 덧붙이지 않아도 존재감 자체로 그 뒤에 있는 거장을 드러내는 것이 진짜다. 수많은 가짜 중에서 진짜를 발견하려면 눈에 잘 띄지 않는 미세한 차이를 잡아내는 것이 관건이라 하였다. 하지만, 그 숨은 보석 같은 진짜를 일단 발견해내면 그 미세한 차이는 거부할 수 없는 확연한 차이로 바뀐다. 거장 화가들에게는 단번에 식별 가능한 고유의 필치(pinceau)’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덧칠로도 감출 수 있는 필치라고 한다. 내 ‘삶이라는 그림’에 거장의 필치가 그대로 담기기를 원한다. 흉내 내고 덧칠한 가짜 인생이 아니라, 거장의 손길이 그대로 드러나는 진짜 인생을 살고 싶다. 진짜는 자신이 진짜임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가짜가 진짜가 아님이 드러날 뿐이다. 





   리움미술관에 갔던 4년 전이 떠올랐다. 일곱 살의 두 딸들과 함께 했던 사진 속 이미지가 스쳤다. 기억은 시간이 쌓이며 가장 중요한 감정만 남긴다. 그것이 그 기억에 대한 핵심감정이다. 하드디스크에서 2014년의 기록을 뒤졌다. 리움에서의 시간들을 클릭했다. ‘행복감’만 남아있었다. 그 당시의 추억을 가진 내가 누리는 선물은 ‘행복’이었다. 나는 그 행복을 리셋하기 위해서 리움에 다녀왔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언젠가는 오늘의 핵심감정을 찾아 또 리움에 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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