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책을 읽다

랩걸(Lab Girl)_호프 자런

여성과학자의 치열하고도 아름다운 인생이야기

by Jianna Kwon
<랩걸(Lab Girl)>_호프 자런 저/alma


이 책을 덮은지 며칠 지났음에도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한 사람의 인생 속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가, 내 마음이 그 사람의 삶에 일부 붙어버려 한동안은 이런 몹시 뜨거우면서도 한없이 고요하고 부드러운, 기분 좋은 이 감정을 안고 지내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이름도 생소한 미국의 여성 과학자 호프 자런의 인생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1969년생으로, 과학 교수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 여성과학자의 자리가 생소했던 시절부터 자기 자리를 찾고 지켜내고 포기하지 않은 채 지금도 그 자리에서 살아가는 한 여성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그녀는 풀프라이트 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유일한 여성 과학자이며, 2016년에는 <타임>이 선정한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으며, 현재는 오슬로 대학교에서 연구 중이라고 한다.

이 책은 그녀가 그녀의 모든 업적을 이루기까지의 자만적이거나 교훈적 내용을 담은 자서전이 아니다. 오히려 한 인간의 '아름다운' 인생 여정을 고스란히 담은 책으로 오래 기억하게 될 책이다. 만 49세의 그녀는 아직 젊다. 그녀를 떠올리며 나는 그동안 자신의 기량을 한껏 발휘하였던 어떤 선수가 이젠 인생의 후반전을 준비하며 뒤돌아볼 때 짓는 미소를 떠올렸다. 그녀의 인생을 따라갔던 책읽기는 내 어린 시절의 꿈을 생각하게 해주었고, 못다 이룬 꿈의 이야기를 나 자신에게 하도록 해주었으며, 이제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묻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약점이나 타인으로부터 어떤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는 문제를 여실히 풀어놓는 것이 그 사람을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 수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다른 어떤 누군가는 평생 숨기고 살고 싶었을 비밀이 그녀의 책에는 소설이 아니라 논픽션으로 고스란히 쓰였다. 아픔과 상처, 고난과 고통은 지난 후에는 눈부신 보석으로 남는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주었다.

여성과학자로서의 쉽지 않은 경력 쌓기, 연구자금을 얻어내기 위한 치열한 분투, 한때 꿈꿨던 다른 꿈에 대한 미련, 조울증으로 인해 고통스러웠던 나날들의 생생한 스케치, 식물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사랑으로 보낸 세월들, 나무를 통한 삶의 비유들, 엄마로서의 깨달음 등은 그녀의 주옥같은 삶의 여정의 일부일 뿐이다. 그녀의 생각과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녀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현명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삶에 진실하였으며 최선을 다하였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하여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나 자신을 위로하기도 하며, 나에게 더 힘을 내어 살아가도록 신선하고도 시원한 바람을 불어주기도 한다.

책을 읽으며 와닿는 부분이 그리도 많고, 그렇게 많이 포스트잇을 붙여두었던 것은 그녀가 다름 아닌 나와 같은 여자이고 많은 고민들은 공유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알지 못하던 한 사람이 자기 생 앞의 시련들과 갈등들을 건강하게 헤쳐나간 모습을 본다는 것은 내 삶에 대해 내가 더 당당하게 어깨와 가슴을 펴도록 해준다. 나도 그녀처럼, 어떠한 모진 바람 앞에서 흔들릴지라도 결국엔 이겨낼 수 있겠다는 소망으로.

모든 시작은 기다림이다.
우리는 모두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든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불가능하면서도 필연적인 존재들이다.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다.


그녀의 글에서처럼, 모든 시작은 기다림이다. 가장 눈부시게 찬란한 시작은 그 어떤 포기할 만한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인내하였던 사람에게 찾아온다. 그래서 지금의 인내가 쓰게 느껴질지라도 결국엔 달고, 지금 내가 하는 오래 참음이 지난하게 느껴질지라도 의미 있다. 누군가의 아름다운 시작을 위해 그 사람의 기다림을 잠잠히 지켜봐 주는 지혜는 덤이다.

나만의 나무를 심는다. 씨앗을 촉촉한 땅속에 심고, 땅이 푹 젖도록 물을 그득 뿌린 후, 햇빛이 그 씨앗을 잘 품도록 그늘을 치운다. 뿌리가 내리고, 줄기가 오르고, 가지들을 힘차게 뻗고 잔가지들이 수많은 잎사귀들로 덮일 동안 나는 기다린다. 바라본다. 또 기다리고 또 바라본다. 그러다가 그 아래 눕는다. 누워서 기다리고 나무에 기대어 앉아 기다리다가, 일어나 나무의 굵은 몸을 끌어안는다. 그 나무는 내 인생이다. 이제 반쯤 와 있는 내 인생. 열매가 맺히고 이내 그 열매가 떨어져 딱딱한 껍질을 뚫고 새로운 싹이 틔우면, 나는 나의 잎사귀를 치운다. 조심스럽게 내 몸 사이를 지나 그 어린 싹에게 빛이 들어가도록. 그 어린 싹이 나무가 되기까지 나는 기다린다. 바라본다. 또 기다리고 또 바라본다. 그게 인생이다.



The Well-beloved
오래 곁에 두고 싶은 책 한 권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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