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책을 읽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_요나스 요나손

100세의 예쁜 할머니를 꿈꾸며

by Jianna Kwon

전날 저녁 몸살이 나서 꽤 오랜 시간 잠들었다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다. 좀 멍한 정신으로 물 한 잔 마시고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너무 오래 자서 머릿속이 맑지 않은 느낌이었고 몸도 아직 말끔하게 괜찮아진 것 같지 않았지만, 잠을 더 잘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 뭐라도 읽어볼 요량으로 책장을 두리번거리다가 '바로 이거'하며 꺼낸 책이었다. 가라앉은 몸 상태처럼, 물먹은 듯이 추욱 늘어진 감정 상태를 좀 가볍게 만들고 싶었나 보다. 드디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책장에 꽂힌지 수개월이 지난 그날에서야.

이 책은 말름셰핑 마을에 위치한 양로원에서 자기 방 창문을 열고 탈출한 '알란 칼손' 할아버지의 이야기다. 그것도 자그마치 백 세 생일날에! 때는 2005년이었으니, 할아버지는 1905년생이었던 것이다. 유럽에서 20세기 초반에 태어났다는 것은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했다는 이야기이고, 전쟁뿐만이 아니라, 이념의 대립, 과학과 경제의 눈부신 발전 속에서 살아왔다는 의미이다. 이 책은 백 세 생일날 도망친 할아버지의 2005년의 탈출 이후의 행적과, 할아버지의 1905년부터 2005년까지의 인생역정을 번갈아 보여주며 할아버지 인생의 현재와 과거를 함께 여행하게 한다.

행동하기 전에 오래 생각하는 타입이 아닌 알란 칼손의 양로원 탈출은 다분히 충동적이었고, 그는 심지어 트렁크도 챙기지 않았으며 실내화 바람으로 나왔다. "어딜 가고 싶으세요?"라는 버스기사의 질문에 가진 돈을 내밀며, "이 돈으로 갈 수 있는 만큼"이라고 대답하는 엉뚱하고 귀여운 모습은 이 책의 초반에 이 책이 얼마나 흥미진진한지 알 수 있게 해준 시작에 불과했다. 이 책에는 도난 사건과 살인사건, 계획적인 거짓 증언 등이 포함되어 있지만, 요나스 요나손의 글 솜씨로 인해 모든 내용을 픽션답게 가볍게 받아들이며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범죄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알란 칼손이라는 한 할아버지의 인생 이야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므로. 게다가 액자 구성으로 되어 있는 할아버지의 지난 100년간의 삶은 그 자체로 매우 특별한 경험을 담은 것으로써, 그가 세계사의 주요 장면에 어떻게든 개입되어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우리가 당연히 이름을 들어보거나 사진으로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와 어떻게 '아는 사람'이 되었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나 자신도 역사적 사건에 깊이 개입되어 버린 느낌까지 받게 된다. 말 그대로 '역사 속으로'가 현실이 되는 것 같은...

아무 약속도 없이 찌뿌둥한 몸으로 손만 까딱까닥 책장을 넘기며 보았는데 꽤 두꺼운 이 책을 어느새 다 읽어버렸다. 매우 흥미진진한 여행을 하고 다시 집에 돌아온 것처럼 마음도, 몸도 새로운 기운으로 가득 차고 내 안에 꿈틀거리는 어떤 즐겁고 간질거리는 느낌을 기분 좋게 누렸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두 가지 상반되는 생각이 순간 머릿속에 떠올랐는데, 한 가지는 다소 진지하고 무거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못 귀염성 있는 어떤 이의 말이었다.

전자는 인간이 태어나 자라는 환경과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대한 생각이었다. 몇 주 전쯤 인터넷으로 어떤 분의 역사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그분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였다. 지금 이렇게 행복하게 무탈하게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우리와 일제강점기 때 원치 않게 여성 위안부에 끌려가 모진 경험을 한 분들의 차이점이 무엇이냐고. 이 땅에서 안정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있는 우리와 시리아 난민들의 차이점이 무엇이냐고. 우리가 그들보다 깨끗하고 정직하고 죄 없이 살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보다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 '나라'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 그 나라가 힘을 가졌는냐 아니냐의 문제라고. 그 부분을 들을 때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 이 나라에 대해 내가 그동안 감사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누구나 원치 않는 환경에서,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결코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적 상황 속에 묻혀버릴 것 같은 숨 막힘을 경험할 수 있다. 이 책의 주인공 백 세 할아버지 알란 칼손도 정말 쉽지 않은-아니, 말도 안 될 만큼 험난하고 스펙터클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그러했고, 세상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으며,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살아남는 것, 그리고 순응하는 것이었다. 조금 더 진지하게 가자면 알란 칼손 할아버지의 인생의 수많은 선택에 대한 고찰이 있어야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그의 삶을 해부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할아버지가 그 모든 상황들에 대하여, 읽는 내가 가볍게 웃고 넘길 수 있게 해줄 만큼 초월적(?)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반응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음에 주목한다. 상황은 부적응 상태를 충분히 초래할 만큼 다이내믹하게 변하지만, 일관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현재에 집중하고 충분히 그것을 누리는 그의 모습에 감동하게 된다.

후자는 제법 귀여운 생각이라 하였다. 문득 떠오른 한 문장이 무엇이었냐 하면, "예쁘게 늙어요, 우리!"라는 지인의 웃음 띤 이 말이었다. 그 말씀을 하신 분-나와 나이 차이가 열 살도 훨씬 더 나는-이 연세가 비슷하신 어떤 분과 예쁘게 늙는 할머니가 되기로 서로 이야기했다며 깔깔깔 웃는 그 모습이 떠올랐다. 이는 외모가 예쁜 할머니를 의미하게도 하겠지만, 더 중요한 점은 곱고 우아하지만 꽉 막히지 않고 대화가 통하며, 마음의 젊음을 잘 유지하는 노인이 되고 싶다는 의도였으리라. 이 책을 덮고 난 후, 그분이 나에게 하셨던 "예쁘게 늙어요, 우리!"라는 말이 떠올랐던 건 내가 나의 100세를 잠시 상상해보았기 때문이다. 젊을 때 노년의 모습을 상상하고 어떤 소망을 품게 되는 사람은 행운을 얻은 사람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늙어가고, 누구도 예외 없이 늙어가지만, 우리는 모두 자신의 노년의 모습을 선택할 수 있고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은지 생각하다가 몇 가지 떠오른 생각들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사랑받다가 떠나는, 그리고 후회 없이 사랑하다가 떠나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마음이 깊고 고요하되, 이야깃거리도 많고 들을 귀는 크며, 얼굴에 핀 웃음기가 촉촉하여 누구라도 편하게 쉬어갈 수 있는 삶. 지쳐있는 한 사람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힘을 줄 수 있는 삶. 무엇보다 우리 손주들에게 평생 잊히지 않을 곱고 따뜻한 할머니로서의 마지막을 꿈꾼다. 멀 것 같지만, 언젠가는 내 눈앞에 있을 나의 100세에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꿈꿀까? 알란 칼손 할아버지에 비하면 반도 살지 않은 이 어리고 앳된 지금 마음먹고 그때를 준비한다해도 늦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The Well-beloved
예쁜 할머니 되기 프로젝트 지금부터 시이~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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