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합 쌍둥이의 인생 이야기
어느 토요일 오후, 아이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며 라디오를 켰다. 책 읽어주는 라디오에 주파수를 맞추고 익숙한 음성으로 책 읽어주는 소리를 듣는다. 햇살이 잘 드는 낮에 라디오를 켜고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시간은 내게 꿀같은 시간이다. 토요일은 그 주에 읽었던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주는 날이었다. 사라 크로산의 <원 one>이라는 책 이야기를 주중에 시간이 될 때마다 듣곤 했었는데, 그날은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더 귀를 기울이며 책 읽는 소리를 듣기에 나도 더 집중하여 글 읽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아이들은 이 책의 주인공의 삶에 대해서 너무 안타까워했다. 분명히 두 사람이지만, 몸은 하나로 연결된 결합 쌍둥이라는 존재가 아이들에겐 매우 생소하기도 했으리라. 아이들은 구체적으로 상상을 해보고 또 해보아도 둘이 붙어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지만 살아가기 매우 힘들 것 같다며 마음 아파했다. 그때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거지. 내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내 이야기처럼 느끼기 위해서. 완전히 알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의 감정에 조금 더 닿아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책의 결론을 궁금해하는 아이들을 위해 앱으로 그 라디오 프로그램에 책을 받고 싶다고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이 책을 라디오국을 통해 선물로 받아서 읽을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이 책이 우리에게 특별한 책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 깜짝 선물이었다.
이 책은 세 다리 결합 쌍둥이인 티피와 그레이스의 이야기이다. 열여섯 살, 홈스쿨링을 접고 혼비컨 사립 고등학교에 가면서부터 생긴 일들을 중심으로 쌍둥이 중 한 명인 그레이스가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풀어간다. 상체는 떨어져 있고 팔도 네 개이며 머리도, 심장도, 몸통도 두 개씩인 두 명의 사람이 치골부에서 몸이 결합되어 다리는 세 개인 상태로 태어났다. 다리 세 개 중 하나는 퇴화되어 꼬리처럼 되어 있는 몸이었다.
여기
우리가 있다.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다.
정말 놀랍지 않나?
우리가 대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녀들이 피카소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그리기 때문이라 했다. 사람들은 본질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티피와 그레이스를 보기에 그녀들은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내뱉는 사람들에 의해 괴물로 불리기도 했고, 표정과 몸짓으로 그녀들을 거부하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 있지만, 그레이스가 싫어하는 것은 '시선'. 도처에 널린 시선이 싫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군가의 악몽에 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싫었다. 티피와 그레이스가 가장 원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평범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돋보이고 싶고, 특별하게 대우받기를 원한다지만, 티피와 그레이스는 평범한 것이 가장 좋고, 그것이 필생의 목표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원하든 원치 않든 눈에 띄고,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주고, 사람들로부터 거절감을 느끼는 삶은 그녀들에게 가장 큰 짐이다. 하지만,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삶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상관없이 주어진 그 인생을, 그 시선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녀들이 살아온 방법이었다.
한 명이 아프면 다른 한 명도 아프다. 하지만, 그중 한 명이 먼저 나아도 다른 한 명이 아프면 일어날 수 없다. 함께 앓고 함께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이 그녀들의 삶의 방식이다. 상담을 할 때면 다른 한 명은 볼륨을 한껏 높인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어야 했다. 서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 혹은 각자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투명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그녀들이 나름 터득하고 익숙해진 생활방식이다. 사랑은 더더욱 불가능하게 보였다. 그 어떤 남자와 단둘이 있을 수 있다는 건 그녀들에게 환상일 뿐이었다. 한 사람과 단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도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셋이었다. 티피와 그레이스는 육신에서 벗어나는 것을 상상한다. 영혼에 모든 것을 바치고 육신으로부터 자유하고 싶은 꿈을 꾸어본다.
나는 울부짖고 비명을 질렀다.
티피가 필요했다.
나는 울부짖고 비명을 질렀다.
티피가 필요했다.
티피를 잃은 고통이 뼈에 사무쳤다.
온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내가 잃은 것은 나였다.
내가 잃은 것은 나였다....
사람들은 분리수술해 대해서 자주 그녀들에게 물었다. 그렇게 묻는 건, 자기들이라면 그녀들처럼 살지 않기 위해 무엇이든 했을 것이라는 의미이고, 지금의 자신들처럼 각자 하나의 몸으로 살기 위해서 어떤 위험이라도 감수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녀들에게 분리수술은 단지 평범해지고, 정상적(?)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일부를 떼어내는 것이고, 상상도 하지 못할 심리적 박탈감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마땅히 둘이었어야 하는 두 사람을 떼어놓음으로 깔끔하게 두 인생을 만들어내는 일처럼 보이는 분리수술이, 사실 당사자들에게는 하나였던 두 사람이 찢어지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평범함을 원하지만, 하나였던 둘이 정말 둘로 나뉘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것이 그녀들의 진심이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눈물이 고였다. 그렁그렁 한 눈물이 눈 속을 가득 채울 동안,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르는 뜨거운 기운을 느꼈다. 나는 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했다. 온전한 하나가 되기 위하여 치러야 했던 대가에 대해 생각했다. 아프고 죽음에 이르러야 했던 건 나였다. 하지만, 내 심장을 뛰게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내 심장의 기능을 대신하여 나를 살려야 했다. 나는 그 심장의 기능으로 겨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더 이상 그렇게 둘인 채로 버틸 수 없었다. 그리고 문제의 시작이었던 내 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로 인해 나는 생명을 얻었다. 나는 새로운 심장을 달고 세상을 살아간다. 이제 나는 혼자다. 하지만, 내 영혼은 혼자가 아니다. 육신으로는 곁에 없지만, 그 무엇보다 내 인생의 강한 자취를 남긴 그분을 느끼고 그분과 한 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새로 태어난 인생이 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의 이야기는 나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둘로 살았고, 어떻게 하나로 살아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지막까지 이렇게 읽히고 내 이야기가 되어버린 이 책으로 인해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이 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다. 함께 가슴 뜨거워지고 떨리는 손으로 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결합 쌍둥이로 살아가는 티피와 그레이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을 잃어버린 채, 잃어버린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말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삶을 함께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가 된다는 건, 영원히 그리움의 대상이 될 누군가가 되어준다는 거다. 하나가 된다는 건, 내 모든 생각과 계획을 포기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며, 내 모든 아픔과 기쁨을 모두 공유하겠다는 것이다. 하나가 된다는 건, 나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이 된다는 것이다. 당신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듯이, 나도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듯이, 나도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하겠다고 삶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The Well-beloved
사랑이 영원할 수 있는 건,
그것이 온전한 하나 됨을 이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