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파크에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남겨진 자들의 기억에 대하여

by Jianna Kwon
[서점] 북파크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294
매일 10:00AM-10:00PM 설/추석 당일 휴무
3만원 이상 서적 구매시 3시간 무료주차


아픈 일을 겪었다. 슬픔을 겪었다. 지치고 무거운 돌덩이가 가슴을 누르는 것 같은 날이었다. 우리 가족 모두가 상실을 경험했다. 우리는 아직 가보지 않은 그 문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는 일은 아무리 아름답게 생각하려해도 눈물 나는 일이다. 멍한 정신으로 바쁘게 흘러가는 며칠을 보내고 맞은 어느 날, 다음날엔 출근해야 하는 남편과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과 함께 축 늘어진 채 늦은 오후를 보내다가 일어서서 찾은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북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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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숲으로 걸어가다


기분이 가라앉고 우울한 감정에 묻혀버릴 것 같은 날에는 서점으로 향하곤 한다. 무료하거나 기분이 상쾌한 어느 날에 가는 일보다,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감정을 추스르고자, 혹은 그 기분을 더 가라앉혀 한동안 머물고자 서점으로 향하는 일은 내게 의미 있는 일이다. 절실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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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날엔 책으로 둘러싸인 ‘책숲’으로 간다. 한때는 나무였을, 이제는 지울 수 없이 선명하게 잉크 자국이 남고 저마다의 독특한 컬러로 채색된 종이들 사이를 거닌다. 애써 웃으려고 하지 않아도 뭐라 할 사람 없이, 오직 눈을 감고 잠잠히 나를 받아들여주는 쌓이고 묶인 종이들 사이로 걸을 수 있는 그 시간이 위로다. 힘내라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해도, 놓인 책표지의 인쇄된 글씨만으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곳이 나의 ‘책숲’이다. 평대 위의 책들이 잔디가 되고 내 눈은 쉴 새 없이 문자들 위에서 춤을 춘다. 때론 빠르게, 때론 느리게 춤을 추다가 멈추었다가 마음을 노크하는 어떤 문장을 만나면 그곳에 주저앉아 버린다.


언젠가부터 집에 들인 책들을 읽고 나면 거실 구석에 무심하게 쌓아두는 버릇이 생겼다. 그 책들을 수용할 책장의 공간이 부족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쌓는 일이 책숲을 만드는 일 같아서 좋았다. 수 십 권의 책이 쌓여 중심을 잡기 어려워지면 벽에 잘 기대어 세우고 그 옆에 새로운 책나무를 세우는 일을 시작했다. 책장에 가지런히 책을 꽂아두는 일보다 집에 책나무를 세우고 책나무마다 서있을 수 있을 만큼 키가 자랐을 때 곁에 또 다른 나무를 심는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것들이 우리 집에서 작은 책숲을 이룰 것을 기대하면서. 존재만으로도 미소 지어지게 하는 나의 사랑스런 ‘책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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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과연 틀리지 않을까?


아이들은 벌써 북파크의 어린이 코너의 동굴 속으로 숨어버렸고, 가끔 나와서 원하는 책을 검색해보고 찾는 일에 바빴다. 우리 부부도 각자의 취향에 어울리는 책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어떤 책을 읽을까, 이런 마음일 때는 어떤 제목이 내 마음을 움직여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찬찬히 책제목들에 눈길을 주다가 만난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이 책의 제목을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이 책의 표지는 회색빛의 흐릿하고 차가운 골목길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듯 불안하게 서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담긴 이미지였는데, 인터파크에서 리커버하여 꽤 귀여우면서도 따스한 느낌의 표지로 변신한 책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표지가 바뀌고 나니 도무지 책의 내용이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래서 들여다보게 된 이 책이 ‘기억’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과 2011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줄리언 반스의 소설임을 알게 되었다. ‘기억’이라... 순간 내 안의 어딘가에 있던 아픈 기억들이 갑자기 밀려들 듯 떠오르는 건, 그것들이 죽음과 맞닿아 있어서였을 것이다. 예감이 틀리다는 것을 칼로 자르듯 분명하게 보여줄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이 책을 꼭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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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1, 기억의 선택과 왜곡에 대하여


고등학생 시절, 토니 웹스터에겐 앨릭스와 콜린이라는 두 명의 친구가 있었고, 이 세친구들에게 전입생 에이드리언 핀이라는 또 한 명의 친구가 생겨 이들은 넷이 되었다. 키가 크고 조용한 성격으로, 1등급 성적과 또래 친구들과는 다른 놀라운 사유의 힘을 가진 에이드리언은 다른 세 명의 친구에겐 데미안 같은 이였다. 누구든 그와 가까이하고 싶어 했고, 그렇게 함으로 지적 허영심을 대리만족 하고자 했으며, 그렇게 에이드리언은 세 친구들에게 자랑이자 선망 혹은 시기의 대상이었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조 헌트 선생의 역사수업에서 에이드리언이 역사에 대해 인용한 이 말은 이 책의 골자를 이룬다. 토니 웹스터가 사랑하던 여자 베로니카와 그녀의 집에 초대된 며칠간의 시간과 기억들 후에 남겨진 건 둘의 이별이었다. 이후 에이드리언 핀의 자살이 알려졌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알려진 베로니카의 엄마의 사망 후의 유서와 에이드리언의 남겨진 일기장으로 인해 노년의 토니는 자신의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 책은 마지막 두 세 페이지에서 놀라운 반전을 보여준다. 그 반전의 단어로 인해 나는 그때까지 이 책을 읽으며 쌓아 올려온 스토리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붕괴를 경험하고, 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고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집에 돌아와 나는 이 책을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번을 읽었다. 원서로 150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경장편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게 될 것이므로 300페이지의 장편이라고 말했다는 줄리언 반스의 말대로.



남겨진 사람의 이야기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역사는 결국 살아남아 그것을 기억하는 자들의 선택에 의해 정리되는 것이다. 어쩌면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지라도, 그 사건의 주변에 있어 일부라도 무언가를 아는 누군가의 기억이 역사를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불완전한 것이 역사다. 선명하게 기억되는 일도 사실은 객관적인 사실이라기보다 주로 내 편에 편중된 선택적 기억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내 입의 말로 조금씩 가감되고, 그렇게 왜곡되고 변형된 기억은 실제로 나 자신마저 속여 실제 사건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거나 더 아름답게 포장하기도 한다. 때로 실제보다 훨씬 비관적으로 변한 기억들은 자기연민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사후를 생각했다. 그것은 나의 사후가 아니라, 아주 오래 전 누군가의 사후에 남겨진 내가 겪어야 했고 선택해야 했고 묻어둬야 했던 무자비한 정보에 대한 것이다. 내가 아는 것과 다른, 타인의 이야기로 인하여 내가 겪었던 아픔은 반전의 황당함보다 진실을 아는 사람이 이미 증언을 해줄 수 없는 상태라는 것으로 인한 갑갑한 통증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선택해야했다. 어떤 것을 진실로 남길지를. 그것은 내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내가 너무 아프지 않도록 그것을 잘 정리하여 조용히 묻어두었다. 꽁꽁 싸매어 더 이상 거론되지 않도록.


한편으로는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내 인생의 어떤 말과 행동으로 인한 파급력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내가 원하지 않게 상처준 일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내가 아픈 일은 기억해도 타인을 아프게 한 일은 도무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주 생생하게 둘 사이에 터져버린 일이나 상처 주었다는 생각에 내가 괴로웠던 때 말고는. 대부분의 기억은 자신에게 최선의 것으로 재구성된다. 그렇게 기억이 재구성되는 일은 필연적이어서 사실을 감정이 감싸고 의식과 무의식이 손을 잡은 채 사실을 다듬는다. 그렇게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작은 무언가로 만들어진 기억만이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 잡을 수 있다. 이런 재구성마저 불가능한 기억들은 무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묻혀버리는 거다.



내가 더 이상 내 삶을 증언할 수 없는 날이 오거든


날 원망하지 말기를,
날 좋게 기억해주기를.
세상 사람들이 날 좋아했다고,
날 사랑했다고,
내가 나쁜 놈이 아니었다고
말해주기를.
이중 해당되는 경우가 단 하나도 없다 한들,
부디



이 책 속에서 살아남은 자이자 이 역사를 기록했던 토니의 마음 속 소원을 몇 번이고 읽었다. 죽음이 두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남겨진 자들의 나에 대한 기억 때문이리라. ‘부디’라고 말해야만 할 만큼 간절하게, 우리는 사후의 남겨진 자들의 평가에 자비를 구한다. 내가 떠난 후에 살아서 나의 역사를 나름으로 기억할 사람들에게 자비를 구해도 되지 않을 만큼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뜨거운 가슴으로 살다가 수많은 사랑의 점들(spots)을 인생길 위에 남긴 사람으로 남고 싶다. 그 사랑의 순간들이 선(line)이 아니라 점(spot)이었다 해도 그것이 수없이 많아서 선처럼 보일수도 있는 자취를 남긴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무수한 점들에 진실한 마음을 쏟았던 사람으로.


이젠, 또 다른 남은 한 사람 베로니카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에겐 어떤 인생이 기억되었는지, 이 모든 거대한 혼란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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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6. 3. MON

The Well-beloved


p.s. 도무지 완전히 걷히지 않고 문득 솟아올라 머물다 갈 것 같은 당신과 나의 이 슬픔이 거대한 돌덩이였다가 자갈로 부서졌다가 모래가 되기를. 그리하여 어느 순간 불어올 바람에 흩어지는 모래를 바라보며 가벼운 마음으로 미소 지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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