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시의 세계로
[서점] 다시서점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42길 34
월, 화 휴무
평일, 주말 12:00PM-6:00PM
www.dasibookshop.com
한강진역의 블루스퀘어에서부터 이태원 방향으로 걷는다. 따사롭게 쏟아져 내리는 햇발이 온몸과 마음을 뽀송하게 말려주는 것 같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는다. 가로수 아래의 화분 한 가득 핀 오색찬란한 꽃들이 한아름 꽃다발 같다. 향기에 물들고 햇살에 씻기는 듯, 산책길이 유난히 행복한 오후다.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저마다 세련된 자태를 뽐내며, 최근에 인테리어를 마무리한 듯 반짝거리는 숍과 카페들이 눈길을 끈다. 음반이 가득한 곳과 예쁜 소품을 파는 가게와 커피향이 발걸음을 느리게 하는 카페 앞을 지나 현대카드스토리지의 안내판을 보게 된다면 그곳이 바로 멈추어서야 하는 곳이다. 몸을 왼쪽으로 틀면 아찔한 계단이 나타난다. 아무도 없는 가파르고 높다란 계단의 꼭대기에 서 있으니 깊숙하게 숨겨져 있는 보물을 찾아 떠나는 느낌이다. 톡. 톡. 톡. 톡. 샌들이 계단을 하나도 빠짐없이 가볍게 두드리고 내려가는 소리가 경쾌하다.
다시, 서점 그리하여 ‘다시서점’
계단 아래에 다다른 후, 오른편으로 걸어 올라가면 얼마 후 ‘다시서점’을 왼편에서 만날 수 있다. 책을 곧 먹어버리려고 하는 기다란 얼굴이 그려진 하얀 안내판에 서점의 이름이 단정하게 쓰여 있다. 그 앞에 어느 집 앞 ‘개조심’처럼 강렬한 빨간 색으로 나무판에 써진 ‘들어와’라는 글이 정겹다. 외관 앞에서 피식 웃으며 사진 한 장 남기려던 찰나에 지나가던 남성 두 명이 내가 관심 있어 하는 이 서점에 대해서 한 마디 대화를 나누고 간다. “여기 알아? 여기 괜찮아. 분위기 있어.”, “그래?”라며. 툭 던지듯 하고 간 한 마디가 긴 여운을 남긴다. 나도 이곳을 좋아하게 될 것 같은 느낌. 이 서점의 뚫린 콘크리트 벽의 짙은 블루 컬러가 압도적인 이미지를 처음 보았을 때 ‘꼭 가보고 싶은 서점 리스트’의 상단에 써놓았던 그 느낌 그대로.
‘다시서점’은 2014년 5월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서점이 사라지는 시대, 다시 서점을 하자.’라는 모토로 ‘다시서점’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이 서점은 변신서점으로, 낮에는 서점으로 밤에는 바(bar)로 사용된다. 효율적인 공간 사용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서점만으로는 살아남기 힘든 현실에 대한 반영 같아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어쨌든 낮 동안에 이곳은 시집과 시인의 산문들, 또한 독립출판물들을 판매하는 서점이다. 지성보다는 감성이 앞서는 날이나, 감성이 늘 앞서는 사람이라면 이곳을 기억해두시기를.
오늘은 시의 세계다
대형서점이나 대형도서관이 머리 위 높은 곳까지 쭉 뻗어 올라간 거대한 책나무들이 둘러싼 책숲 같다면, 이곳 ‘다시서점’은 나만의 비밀스런 책동굴 같은 느낌이다. 아늑하기도 하고 신비롭게도 느껴지는, 책이 숨을 쉬는 동굴이랄까. 이곳에 오기 전에 내 마음은 이미 ‘시’에 대한 갈증으로 차 있었기 때문에 오늘은 좋은 시집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많은 시집들에서 젊은 시인의 시적인 생명력이 파닥거리는 물고기처럼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어떤 제목 앞에서는 20대의 치열했던 내 삶의 복잡하고 유난했던 시기들이 떠올라 잠시 멈춤하기도 하고, 어떤 제목 앞에서는 너무 당돌하고 솔직한 제목에 잠시 멈칫하기도 한다.
잡지 <bear>와 이광호 작가의 우화집 <숲>도 마음에 들었지만, 오늘은 ‘시의 날’이니 시집으로 시선을 돌린다. 손바닥보다 작은, 아담한 연미색의 시집들이 가지런히 꽂혀있다. 그 어떤 장식도 없이 제목만 과장 없이 적혀있는 소박한 책등이 편안하다. 수 십 년 전의 오래된 시집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는 선택한 오늘의 시집은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정지용 시인의 <향수>다. 한 권에 사 천 원이라는 커피 한 잔 가격으로 오늘의 나의 시집 두 권이 가방 안에 들어온다.
연연한 녹음 속에서,
‘맥심 플랜트(Maxim PLANT)’로 향한다. 입구랄 것이 없이 전면이 모두 트여있어 개방적인 느낌으로 환하고, 밖에서 살짝만 보아도 녹음이 푸르른 그곳에 발걸음이 닿는다. 좋아하는 아메리카노 한 잔 연하게 주문하고 하얀 머그컵을 가득 채우도록 찰랑거리는 커피를 받아들고 조심스럽게 이층으로 향한다. 활짝 열어젖힌 창문가의 푹신한 자리에 앉아 눈을 감으니 얼굴에 노오란 온기가 닿는다. 빛이 엷고 고운 잎들처럼 나도 빛을 머금는 시간, 커피향도 그윽하고 새콤하고도 달며 쓴 맛이 동시에 느껴지는 커피의 맛도 좋다.
같은 시대를 살았기에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모두 경험한 두 시인의 시에서 순수함과 서정성, 그리움을 만난다. 지금의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와는 꽤 다른 언어로 인해, 입으로 소리 내어 읽어야만 더 쉬이 이해가 오는 시들을 읊조리듯 읽는다. 입가에서 퐁퐁 터지듯 나오는 시의 언어들을 동그란 사탕처럼 돌돌 말아 입안에 넣어 살살 굴려본다. 달빛으로 눈물을 말리겠다는 시인의 언어가, 사라져 저 별이 되겠다는 시인의 소망이, 언덕에 누워 바다를 보며 빛나는 잔물결을 보며 그것이 셀 수 없이 많음에 겸허해진 시인의 마음이 녹아져 들어온다. 유리창의 입김을 닦아낼 때 물먹은 별이 되어, 반짝 보석처럼 빛나는 모습을 시에 담은 시인의 감성이, 바람은 좋은 알리움(알림)이라고 표현한 시인의 충만한 기대가, 겨울에 바라본 한밤중의 잉크빛 바다의 선명한 표현이 내 주위의 공기와 색깔을 바꾼다. ‘쓰다듬어 주고 싶은, 쓰다듬을 받고 싶은 마음이올시다‘라는 한 문장 속에서 느껴지는 상황적 아픔과 시인의 외로움과 괴로움이 움푹 패이게 하는 굵은 빗방울처럼 내 마음 속에 떨어지는 것 같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잇슬 테요
모란이 뚝뚝 떠러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흰 서름에 잠길 테요
학창시절 수없이 읽어 이제 너무나 익숙해진 이 시를 다시 읽으며, 시대적 상황을 초월하여 저마다의 인생에 대해 생각하니, 여행 작가 이지상님의 글이 떠오른다.
우리 앞에 다가오는 것은 언제나 현재다. 그러나 인식의 세계에는 과거와 미래만이 있다. 방금 전의 일도 우리의 기억에 저장되는 과거이며, 오지 않은 것은 상상 속의 미래일 뿐이다.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통해서 세상을 인식하기에 마음에는 추억과 꿈만 남는다.
인생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기다림, 그리고 과거에 대한 아쉬움이 각각 씨실과 날실로 직조된 다양한 컬러와 채도를 가진 직물이 아닐까? 가까이서 보면 바래지고 해지고 낡고 성글지라도, 몇 걸음 떨어져서 보면 눈물 나게 따뜻하고 아름다우며 두터운 직물인지도. 그것이 어떤 색을 가졌다 해도, 그 직물을 짠 사람만 선명하게 알 수 있는 그 모든 컬러들은 그이의 추억이고 꿈이다. 아프고 쓴 추억도, 채 이루지 못한 꿈도 모두 삶을 이룬다. 인생이란 그 모든 것을 끌어안아 품는 일이다. 씨실과 날실의 교차를 반복할 때, 내게서 나온 실이라면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고 그 교차 속에 당기어 넣는 용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