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람위드북스에서,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인생의 의미는 함께 하는 거야

by Jianna Kwon
[북카페] 유람위드북스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 홍수암로 561
연중무휴 10:00AM-8:00PM
목, 토(심야책방) 10:00AM-11:00PM
070.4227.6640
instagram.com/youram_with_books


듣지 않아도 좋을 말을 듣고, 아니 글로 보고 마음이 이틀째 뒤숭숭했다. 이해하지 못하겠어도 그냥 덮고 넘어가자는 마음과 내 마음과 생각을 투명하게 쏟아놓고 싶은 마음, 똑같이 대응하고 싶은 마음 등 수많은 생각들이 내 안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뒤엉킨 실타래처럼 엉망진창.


화가 났다. 도무지 정리되지 않은 마음 위에 이전의 모든 거대한 수면 아래의 빙산 같은 기억들이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던 잔잔한 바다를 밀어내며 수초 안에 솟아오르는 것처럼 화가 치밀어 올랐다. 평소에는 너그럽게 봐지기도 하던 짜증내는 소리가 빙산을 흔드는 것 같았다. 화를 냈다. 불똥은 엄한 곳으로 튀어 내 마음을 뒤엎었던 그 글의 대상이 아니라 내 옆의 가족들에게로 쏟아졌다. 그리고 침묵.


말하고 싶지 않은 날이 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일 때도 있고, 일촉즉발의 위기에 있는 감정 상태인 경우에 그렇다. 그런 날에 화가 나서 뱉은 한마디는 후회로만 남는다. 너무도 쓸쓸하게 침잠시키는 후회.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말이 참을 수 없이 가볍게 느껴질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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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떠난 유람


목적지를 바꾸었다. 잠시 섬이 되고 싶었다. 흐트러진 마음을 다시 세우고, 나를 토닥이고 싶었다. 크게 기대하고 향한 것은 아니다, 잠시라도 내게 쉼을 줄 수 공간이 필요했다. 남편과 딸들이 낮잠을 잠시 청하다가 들어온다기에 나 홀로 먼저 ‘유람위드북스’의 문을 열었다. 드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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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슈퍼마켓이던 곳에 두 사람이 책을 들였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던 책을 사랑하는 한 사람과 바리스타 출신의 인테리어업을 하는 한 사람이 만나, 천장이 높은 건물을 복층의 북카페로 만들었다. 인테리어를 주업으로 하는 두 사람에게 이곳은 위안이라는 인터뷰 기사를 읽었던 적이 있다. 주인장의 생계와 직결된 북카페가 아니라 주인에게도 쉼이 되고 활력이 되는 북카페라니 손님으로서도 마음이 가벼웠다. ‘유람위드북스’의 곳곳에 그런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우드블라인드 사이로 노랗게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 커피콩을 고르고 나누어 담기 위해 손을 움직일 때마다 나는 찰찰거리는 소리, 한없이 느리게 흐르는 시간. 커피 한 잔이 나오기까지 오늘 내가 만날 책을 기대하며 서가를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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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놓음, 아직 우리 곁에 남아 있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


프레드릭 배크만의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이 오늘의 책이 되었다. ‘한 남자와 그의 손자, 한 아버지와 아들이 주고받는 연서이자 느린 작별인사‘라는 책 소개를 보고 이전부터 꼭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책이다. 새 책처럼 깨끗한 책을 북카페에서 읽는 건 소소하지만 특별한 기쁨을 준다. 삽화가 들어가 있고, 글밥도 많지 않은 책이 필요했다. 책의 여백에서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그런 책이 필요한 날에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을 만나서 다행이었다.


도톰한 머그잔에 담겨 짙은 갈빛으로 가득 찬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 책유람을 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눈부시게 하얀 고양이가 내 곁으로 몸을 길게 쭈욱 뻗으며 다가오더니 내 다리에 일부러 그러는 듯 몸을 대고 부비며 지나갔다. 고양이에 대한 내 감각은 아직 친근한 그런 것은 아니어서 다가갈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다가와 남기고 간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까슬한 느낌에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부드러운 느낌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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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열어 시선과 문자를 하나하나 맞추어가며 열을 따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얼마 후 드드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어오는 달덩이같이 따뜻한 얼굴들을 보았다. 차 안에서 얼마간의 낮잠을 자고 일어나 새로운 마음으로 웃어주는 그 얼굴들이 고마웠다. 나도 미소 지었다. 미안해,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이 모든 단어들이 이제는 가볍게 느껴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진심으로 느껴졌다. 다 안다는 눈웃음이 내게 왔고, 나는 이젠 좀 괜찮아졌다는 미소를 다정하게 보냈다. 각자의 자리를 찾아 앉아 마음에 에너지를 채우고, 쉼을 누리는 나의 가족들의 모습을 따스한 시선으로 쫓아다니다 다시 책 속으로 들어와 노아와 할아버지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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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늦게까지 너를 붙잡고 싶어서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할아버지로 불리는 남자의 머릿속 기억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현재는 잊히고 과거로 점점 더 밀려가버리는 기억의 파편들이 풍경이 되어 버린 그 남자의 머릿속에는 가족이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 아들, 그리고 손자 노아. 나는 이 책속에서 한 남자의 코끝이 찡하도록 뜨거웠던 아내와의 사랑의 기억들과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미처 다 표현하지 못했던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마지막까지 붙잡고 싶은 한 사람인 손자 노아와의 대화들을 만났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서, 그것도 외부가 아닌 내 안에서 사라져버리는 것들에 대해서 도무지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의 절망감을 짐작했다. 하지만, 이 책이 비극으로 쓰이지 않고, 가슴에 은근히 불을 지피다가 마지막에 뜨거운 눈물 흘리게 하는 마지막으로 끝날 수 있었던 건 모든 추억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당신이 옆에 있으면 내가 누군지 언제든 알 수 있었어.
당신이 내 지름길이었지.


나는 평생 어쩌다 내가 그 사람에게 반했는지
궁금해 한 적이 없단다, 노아노아.
그 반대라면 모를까.




그 사랑의 깊이에, 그 사랑의 겸허함에 눈시울을 붉혔다. 사랑은 그런 거다. 나조차 나를 알 수 없고, 찾을 수 없을 때 내가 누군지 알게 해주는 지름길이 되어주는 것. 내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내가 누구인지 이곳이 어디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를 때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빨리 찾도록 도와줄 한 사람의 얼굴. 내 모든 기억을 불러일으켜주고, 내가 마지막까지 기억하고 싶은 그 얼굴이 바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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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엄청 컸어. 조만간 발이 땅바닥에 닿을 거야.



작은 손자가 자라는 것을 이렇게 표현해주는 할아버지라니. 아이가 땅에 가까운 곳에서부터 자라나 결국 장성한 어른이 되어야 내 눈높이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은 아주 평범하고 일반적이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손자를 자신의 눈높이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어른이 무릎을 굽혀 앉아 낮은 자리에서 그 아이를 보는 것과 같은 눈높이가 아니라, 아이가 실은 서 있는 어른과 같은 눈높이에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발이 떠있으나, 키가 자라면 발이 땅바닥에 닿을 거라는 생각이 왜 그리 감동적인지. 아이들이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건 발이 아직 땅에 닿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그리고 쓸 수 있는 건 발이 아직 땅에 닿지 않은 자의 특권인지도 모르지. 땅바닥에 가까운 아이들이 점점 자라 어른인 나처럼 키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먼 아이들의 날개가 땅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현실에 갇혀버리는지도 모르겠다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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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람이 네 권의 책을 들고 유람을 했다. 같은 여행지에서 다른 여행을 하고 돌아온 네 사람은 저마다의 또 다른 추억을 가지고 만났다. 최고의 여행지였다고 말하는 딸의 말에 싱긋 웃어주었다. 고양이 한 마리와 애플주스, 그림책과 만화책들, 따뜻한 햇살과 안락한 의자가 있어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그 말이 좋았다. 나에게도 그러했듯 너에게도 그러했다는 것이.


앞서가는 세 사람을 보았다. 아직은 작은 우리 딸들의 발이 땅에 닿고, 이 딸들의 아이들의 발이 땅에 닿을 때까지도 나의 가장 보배로울 사람들을 보았다. 나의 마지막 순간까지 내 인생의 구석구석 맞닿아 나의 기억들을 소환해줄 사람들의 뒷모습. 마침내 내 발이 이 땅을 떠날 그때에 가장 뜨거운 온도의 눈물로 나를 위해 울어주고, 평생 나를 기억해줄 사람들의 뒷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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