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비채입니다.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되면서 이렇게 많은 분들이 읽어주실 거라 생각은 못했습니다.
공감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드립니다. 정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한 번의 외도로 이혼한다 했을 때, 남자 바람은 다 돌아온다 라는 이야기를 해주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본인은 돌아올지 모르겠으나, 저는 이미 떠났습니다. 돌아오는것도 받아줄 사람이 있어야 돌아올 수 있습니다. 애초부터 가정이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배우자의 외도로 고통받는 많은 분들이 계실겁니다. 저는 이혼을 선택했지만 가정을 지키기로 선택한 분들의 결정이 더 크고 응원받아야 함을 압니다.
가정을 지키기로 결정한 이상 남편을 용서하고 아무렇지 않게 지낼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하지 못한 이야기로 제 이혼이야기는 끝을 내려 합니다. 이제는 아이와 제가 열심히 살아가는 이야기를 써보려고 합니다.
제 글을 읽으신 모든 분들의 가정은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세상천지 나쁜 놈이 된 전남편은 결혼생활당시 좋은 남편, 좋은 아빠, 좋은 사위였다. 심지어 외도하던 동안에도 꽤 좋은 남편이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예의바르고 모범적인 청년이었다.
전남편은 결혼과 동시에 하던 일을 정리하고 부모님의 일을 이어받기 위해 일을 배우고 있었다.
전시부모님께 받은 최저시급에 가까운 급여로 생활했고, 돈을 시부모님이 쥐고 있었기에 5분 대기조로 기다려야 했다. 전남편은 아픈 아이의 병원을 데려가는 것보다 시어머니의 쇼핑을 수행했다.
전 시부모님은 그 지역 유지였다.
이혼을 결정했을 때, 전 시부모님은 다 큰 성인아들을 말린다고 듣겠냐 라는 반응이었다. 전남편에게 "네가 벌인 일은 네가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객관적으로 좋은 시댁은 아니었다. 만삭인 며느리를 데려다 김장을 시키기도 하고, 가방끈 길어봐야 결혼하면 부엌데기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서운함이 극에 치달을 때는 늘 돈으로 보상했다.
전 시부모님은 손자를 찾지 않는다.
친정부모님은 평범한 직장인과 결혼하기를 바랐다.
사업하는 전남편이 못마땅했지만 나한테 살갑고 잘하는 모습에 결혼을 허락했다.
전남편이 나몰래 부모님을 찾아가 용돈을 드리기도 하고 살갑게 대했기에 마음을 많이 주었다.
이혼이 결정되는 그 순간까지 전남편에게 아무 소리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전 남편에게 마음을 준만큼 배신감을 크게 느끼셨다.
지금은 같은 아파트 다른 동에 살고 계시며, 아이의 또 다른 숨구멍이 되어주고 계신다.
아이는 첫 번째 면접교섭날 아빠와 같이 있지 않겠다고 악을 쓰며 울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두 번째 면접교섭이자 마지막 면접교섭이 있었다. 그날 아이는 온몸에 두드러기가 생긴 채 돌아왔다. 그 이후로 면접은 없었다.
아이가 가장 아빠를 많이 찾던 순간은 7,8세였다. 자기를 찾아오지 않는 아빠가 이해되지 않아 아빠는 죽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빠가 죽지 않았다고 여러번 설명할때마다 아이는 눈물을 흘렸다.
아이에게 이혼에 관해 해마다 설명해 주었다. 전남편의 외도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아이는 엄마의 성으로 성본을 변경하고 싶어 했다.
아이는 자기의 의사와 달리 부모가 이혼했고, 자기의 의사와 관계없이 면접을 하지 못한다. 아이는 성본변경은 자기의 의사대로 해달라며 판사님께 진술서를 자필로 작성하였다.
전남편은 성본변경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성본변경을 허가받았다.(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조건으로 성본변경에 동의하겠다 했다.)
나는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있다. 아이와 함께 심리상담을 40회기 진행하며 아이와 함께 내 안의 슬픔을 많이 덜어냈다.
건강하게 오래살기 위해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다. 아이를 자립적으로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 아이에게 매달리는 삶을 살지 않는다.
아이의 미래와 나의 노후를 준비하고 있다. 내 또래의 가정보다 편안하고 여유로운 삶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