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과일이 땡기는 이유

때를 놓친 자의 갈증

by 쓰는사람전볼

예전에 마흔 중반쯤 되는 선배가 그랬다.

행복이 별게 아니라고.

계절이 바뀌고 달력이 바뀔 때마다

3월이면 도다리가 철인 줄 알고, 점심으로 도다리 쑥국을 먹으러 가고

4월이면 꽃게가 철인 줄 알고, 어느 주말 식구들 입에 게 다리를 물려주는 것.

그게 바로 충만한 행복이라고.


제철에 나는 건 뭐든 가장 맛있기도 하거니와

그 철이 아니면 먹을 수 없는 ‘한정된’ 것이라

제철 음식을 푸짐하게 먹고 나면

내가 지금 이 계절을 살고 있구나,

흐르는 이 계절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구나,

마치 푯대를 세워 그 시절을 기억하는 것 같은 일종의 의식일 수 있겠다.

바쁘게 살면서도 일부러 계절 밥상을 찾아 먹는 이유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명상 혹은 작은 쉼표일 수도 있겠다.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올봄엔 나도 제철 과일이 먹고 싶어졌다.

이제 봄인가 싶은 어느 날 딸기가 땡기기 시작해서

이제 제법 봄이구나 싶으니 참외가,

이제 봄도 가네 싶으니 토마토가 땡긴다.


딸기와 참외, 토마토에 관한 내 식욕은

올봄을 푯대 삼기 위한 것도 아니고

시간을 내 사 먹어야 할 만큼 거창한 제철음식도 아니니

바쁜 일상에서 애써 찾는 쉼표도 아니다.


구태여 찾아 먹는 것과 땡겨서 먹는 것은 명확한 차이가 있다.

운동 후 갈증은 우리 몸이 수분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공부할 때 단 게 땡기는 건 뇌의 에너지원인 포도당을 공급하라는 신호이듯이

어떤 음식이 마구 먹고 싶은 건 단순히 입이 원하는 게 아니라

온몸이 원하는 것이라고 한다.


작년 가을에 수확해 냉장창고에 잘 보관해 둔 사과는 싫다.

아직 여름은 일러 수박은 생각나지 않는다.

지금 나는 이 계절의 싱싱한 딸기가, 참외가, 토마토가 필요하다.

이 계절의 비와 바람과 햇볕을 가득 머금고

매대에 싱싱하게 진열되어 있는 제철 과일이 먹고 싶다.

빨갛고 하얀 과육 속 포도당, 비타민이 아니라

때를 맞춰 열매 맺고 아롱지게 키워 낸 그 ‘시간관념’을,

적기에 제 할 일을 한 그 ‘시의성’을 먹고 싶다.

때를 놓친 자의 갈증이 제철과일을 땡기게 한 것일까.


대한민국에서 여자 나이 서른여섯은

결혼과 출산을 거쳐 와이프, 엄마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을 나이.

나의 가정이라는 새 집 벽에 미장이 다 마르고도 남을 시간.

친구도, 직장 동료도, 심지어 스쳐 지나는 사람들마저

밤이면 저마다의 벽 안으로 돌아가

내가 서 있는 이 광장은 고요해진다.

그런 밤이면 무던히도 갈증이 난다.

나의 휴대폰이 울리길 바라는 갈증,

당신의 하루를 듣고 싶은 갈증,

같이 걷고 싶은 갈증,

그러다 작은 지붕 아래로 함께 들어가고 싶은 갈증.


시간은 이미 밤인데 나는 아직 나의 집을 짓지 못했다.

약속한 시간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지만

저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했다.

졸지에 나는 그렇게 때를 놓친 자가 되어

철마다 계절마다 재깍재깍 잘도 나오는 저 제철과일을 갈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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